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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21. 2022

걷기만으로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겠다는 야망

일 년 가까이 산책과 런닝의 중간쯤에 있는 활동을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집에만 있는 나로서는 이게 바람도 쐬고 일상의 풍경에서 살짝 벗어나기도 하고 팟캐스트도 들으면서 굳어가는 몸을 펴는 재활 치료 같은 활동인데, 요즘 들어서는 어쩐지 남들이 사무실과 현장에서 피땀 흘려 돈 벌고 있을 때 바람이나 쐬는 게 맞나 싶은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변해가는 계절의 풍경 속을 걷자면 아무래도 시간의 효능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 저번 주에는 모 카드사에서 만보기 앱을 연동해서 도전에 성공하면 포인트를 준다는 식의 광고가 날아왔다. 그걸 보니 걸음 수로 한 푼이라도 받는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걷기야 어차피 의무처럼 하고 있으니 재미삼아 돈벌이도 하면 나름대로 더 보람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내친 김에 서브폰을 동원해서 걸음 수로 보상을 주는 앱을 일곱 가지 정도 설치하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메인 폰으로 세 개 정도만 쓰고, 좀 오래 걷겠다 싶을때는 서브폰을 챙겨서 걸으면서 돈을 쓸어담을 심산이었다. 앱 하나가 보통 100걸음에 1원을 줄까말까니까 돈이라기보다는 티끌을 쓸어담는다고 말하는 게 적당하겠지만, OTT 구독료의 일부나 과자값 정도는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일단 시작하고 보니 이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메인폰을 갖고 다니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운동할 때까지 서브폰을 챙기는 게 정말 성가셨다. 좀 뛰는 시늉이라도 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들썩거리는 부분이 없고 가뿐한데, 200그램쯤 되는 추를 두 개나 갖고 다니니 영 걸리적거렸다. 하나까진 몸에 밀착되는 가방으로 해결이 되겠는데, 두 개부터는 방법이 없다. 찾으면 적당한 장비를 팔곤 있겠지만 애초에 티끌 같은 돈 좀 긁어모아보겠다고 하는 짓을 위해 돈을 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 대충 아무 가방이나 꼭 쥐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산책의 순수성이 흐려졌다는 것도 그리 내키진 않는 변화였다. ‘산책의 순수성’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느껴보니 이것도 제법 중요했다. 산책이란 원래 그냥 걷는 것이 목적이고, 목적지 같은 것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데 거기에 푼돈이라도 돈벌이가 끼어드니 ‘그저 걷기 위해 걷는 행위’가 아니게 된 것이다. ‘슬슬 그만 걷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목표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어딜 갈 것인지도 앱이 주는 보상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토스’에서는 가까운 지역 몇 곳을 지정해서 갈 때마다 20원쯤을 주기도 하고 제휴 업체의 쿠폰을 줘서 이용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이게 특히 산책을 돈벌이로 만드는 느낌이 강하다. 한 번은 20원을 받자고 뒷산 꼭대기까지 갔다가, 화장품 샘플을 준다는 소리에 수백 미터 떨어진 지하철 역 앞까지 간 적이 있는데, 도착했더니 다 떨어졌대서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냥 운동이었다면 보람찼을 걸음이 헛걸음이 된 것이다.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거꾸로 ‘이런 헛짓거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2000원도 쓸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 회의감 속에 일주일 정도 걸어서 푼돈 모으기 시도를 해봤는데, 어제 좀 많이 걸은 뒤 총정리를 해보고 걷기 앱 대부분을 지웠다. 안드로이드의 영세 걷기 앱은 대부분 자기네 잠금화면을 설정하라고 요구하는데, 여러 앱을 사용하면서 우선 순위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시스템 전력 관리 문제 때문인지 실제 걸음 수와 엇비슷하게 측정해준 앱이 하나밖에 없었던 탓이다. 7천 걸음 넘게 걸었는데 1천 걸음이나 기록될까말까였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월급으로 모래가 잔뜩 섞인 쌀을 받은 기분이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그리하여 지금 남은 것은 ‘토스’, ‘삼성 헬스+ monimo’, ‘뷰티포인트’, ‘빅워크’, ‘캐시워크’뿐인데,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앱은 걸음 수로 순수하게 기부만 하는 빅워크뿐이다. 나머지는 행동을 강제당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스마트폰의 리소스를 너무 소모하는 것 같기도 하다. 충전에 드는 전기세가 걱정스러울 정도다. 게다가 수시로 앱을 열어서 포인트를 받는 작업도 몇 개씩 하자면 이 시간에 책 한 장을 더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순수한 나의 생활, 나의 시간에는 얼마를 매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지속되면 언젠가 이 앱들을 전부 없애버리겠지. 걷기만으로 하루에 200원씩 벌어서 고정 지출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 보겠다는 야망은 아무래도 갖지 않는 게 나은 것 같다. 무료 명상 앱에 요란한 광고를 때려넣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걷기는 그냥 걷기로 남겨야 한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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