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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21. 2022

신발의 수명과 관리와 나의 죗값



지난 8월 말에는 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요즘 결혼식은 단정하게만 입고 가면 크게 흠이 되지 않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족의 결혼식에 캐주얼한 느낌으로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도 도통 입을 일이 없는 정장을 갖춰 입었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는 차에 신은 구두의 밑창이 바닥에 쩍쩍 붙는가 싶더니, 상실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 영혼처럼 쪼개지고 말았다.

다른 때 같으면 어이쿠, 이런 낭패가? 하고 다른 신발을 찾아 신고 말겠지만, 당장 결혼식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마당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구두 신을 일이 워낙 없는지라 딱 맞는 구두는 그것 하나밖에 없기도 했고. 물론 로퍼나 운동화를 신는다고 누가 경우 없는 자식이라고 욕을 하지야 않겠으나 집안에 좀처럼 없는 경사니까 가급적 흠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한 가족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미리 신어봤어야 할 게 아니냐고 욕을 좀 먹고 아버지 구두를 빌려 신었다. 아버지와 발 사이즈가 비슷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무튼 소 잃은 뒤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니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상당히 많은 신발의 밑창이 폴리우레탄으로 만들어지며, 폴리우레탄은 공기 중의 수분과 반응하여 분해되는 가수분해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명이 4~5년밖에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당연히 이것도 여기저기 검색해봤으나 건진 게 별로 없다. 폴리에스터 계통의 폴리우레탄은 수분에 약하고 기름에 강하며 폴리에테르 계통의 폴리우레탄은 그 반대라서 제조사가 잘 만들면 훨씬 나을 수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신발을 만들 건 아니니까 딱히 쓸모 없는 정보다. 한정판 운동화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밑창이 박살나는 현상에 대해 주의하라는 영상을 찍고 완전한 보관을 위해서 진공 밀봉을 추천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사놓은 폴리우레탄 밑창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몇백 만원짜리 운동화를 모으는 분들이 이미 써먹고 있을 테니, 오래 신을 구두라면 밑창이 PU가 아닌 것을 사는 게 제일인 듯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꼭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재난을 겪은 뒤로 신발장에 커다란 제습제를 넣었고, 집안을 뒤져서 신을 수 있는 구두 한 켤레를 더 찾아냈다. 뒤적이면 구두가 나오기도 하는 집안이라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것도 밑창이 폴리우레탄이라는 것은 매한가지라 각각의 구두를 2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굳이 신어서 길을 들이기로 했다. 과학적인 근거는 찾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경험적으로 구두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밑창이 상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꼭 밑창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죽을 길들이는 데에는 분명 좋은 일이라, 오늘도 방에서 구두를 신고 제자리 걸음을 한참 했다. 만보기 앱으로 돈도 벌고 구두도 길들이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인데, 솔직히 말해서 귀찮기 짝이 없다. 두어달 이렇게 하고 끝이면 모를까, 구두가 끝장날 때까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폴리우레탄 구두 따위 영원히 사지 말아야지.


신발을 잘 관리하면 새 신발을 사기가 아주 어려워진다는 게 묘한 딜레마다


그나저나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가진 신발을 대강 점검했는데, 슬리퍼 따위를 제외하면 열 켤레 정도 되는 것 같다. 싸게 팔길래, 약간 잘 입을 때 필요해서, 등산용으로, 주워와서……등등 각자의 핑계가 있지만 약간 많은 것 같다. 과소비나 환경 보호 때문에 많다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기가 성가셔서 하는 소리다.

일단 운동화는 종종 빨아야 한다. 요전에는 비에 젖은 런닝화의 냄새가 고약해져서 식초를 동원해서 빨고 깨끗이 말려야 했는데, 은근히 성가시고 귀찮은 짓이었다. 그렇다고 가죽 신발은 대충 신어도 되냐면 그것도 아니라 먼지를 털고 구두약이나 가죽 크림을 발라야 하고, 누벅은 그게 불가능한 물건이라 누벅 전용 지우개를 써야 한다. 그리고 발이 영 불편한 신발은 전부 슈트리를 끼워서 헐겁게 만들고 있다. 이것만 해도 신발이 많으면 만만치 않은 작업들이다.

그런데 신발은 밑이 더 중요한 법. 이번에는 오랜만에 밑창도 점검했는데, 런닝화의 밑창 마모 속도가 아주 빨랐다. 예전에는 아끼는 신발 밑창이 너무 닳아서 전용 본드와 수선용 고무판을 사서 덧댄 적도 있지만, 품도 많이 들고 신발도 무거워지는 문제가 있어 이 방식은 포기했다. 대신에 예전에 시도했던 실리콘 본드를 곳곳에 발라놓는 방법을 다시 해봤다. 하루만 말린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틀 가량을 건조해서 시험했는데, 약간 더 견고해진 듯싶다. 한 달은 가지 않을까? 추가로 시험 삼아 마모가 심한 부분에 골을 파서 붙인 ‘유리 미끄럼 방지 패드(PVC)’는 변형 없이 버텨주고 있어서, 앞으로는 이것으로 보수할 작정을 했다.

이런 손질을 하자면 자기 물건을 잘 아끼고 꾸려가는 실감이 있어서 좋긴 하다. 게다가 발에 잘 맞도록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디자인된 신발을 잘 닦고 발에 맞게 길들이며 보수하는 작업에는 훌륭한 물건을 감상하는 순수한 기쁨도 있고, 신경 쓴 만큼 빛이나 편안함이 돌아온다는 보람도 있다. ‘구두닦이’라는 전통적 이미지 때문에 신발 관리라는 영역을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는데, 진지하게 해보면 의외로 프로페셔널하고 심지어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느긋할 때나 그렇단 소리고, 조금이라도 바빠지면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운동화를 받는 세탁소도 있고 구두닦이도 있고 신발 관리 정기 구독 서비스도 생긴 것이리라. 하지만 ‘그걸 돈 내고 맡기느니 내가 하겠다’ 같은 재정 상태와 사고 방식을 겸비한 나로서는 완전히 딴나라 얘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있는 신발이 터지고 깨질 때까지 신어서 품목을 줄이는 수밖에. 신발의 수명을 늘리면서도 이따금 구입한 결과가 이것이니 이제 구입 금지로 죗값을 지불해야만 한다. 일 년에 마음에 드는 신발 한 켤레쯤 살 자격은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나, 신발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시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성미와 양립할 수 있는 자격은 아니다.

그나저나 어떤 신발은 길이 들 때까지 지옥을 맛보면서 신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길들이기를 남이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신지? 내가 듣기론 영국 여왕에게는 그런 ‘신발 길들이기 담당자’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여왕이 서거하셨으니, 그 담당자분은 어떤 심정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되셨을지 모르겠다. 타고난 하나의 발 사이즈로 다양한 고객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영역일 것 같은데, 아무쪼록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신발 수선할 때 종종 하게 된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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