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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08. 2022

맛있는 것 찾아 먹기를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


지난 주말에는 외식을 했다. 내가 단편 ‘자애의 빛’으로 참여한 신간 “내 몸을 임대합니다”가 출간되어 축하차 가족끼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간 것인데, 식성과 취향이 각기 다른 우리 가족이 뭘 먹으러 나가면 늘 그렇듯이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식사는 아니었다.

일단 뭘 먹을지 정하는 과정부터가 언제나처럼 시원치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머릿속에 뭘 먹고 싶다는 욕구도 계획도 없는 사람이라 먹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확고한 답을 내놓지 못하기 일쑤인데, 이번에는 어쩐지 닭갈비가 떠올랐다. 분명 유튜브에서 누가 맛있게 먹는 영상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닭갈비를 주장했으나…… 형의 반대 의견에 부딪혀 기각되었다. 하기야 예비 형수까지 같이 먹는 자리인데 닭갈비는 너무 경제적인 메뉴인 듯 싶기도 했다. 밀키트 따위로 집에서 먹기에도 어렵지 않은 편이고.

그리하여 변경된 메뉴는 소고기였다. 확실히 비싸고 맛있고, 뭘 기념하여 외식으로 먹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메뉴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니 원래 가려던 집이 망해서 없어진 게 아닌가. 별수 없이 근처에서 적당한 ‘한우’ 전문점을 찾아서 들어갔다.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멋지고, 일단 겉보기엔 아무 손색도 없는 가게였다. 방처럼 나눠놓은 공간에 자리잡고 메뉴판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메뉴판을 보고 우리 가족이 느낀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초에 계획한 것과 달리 돼지 고기를 팔지 않는다는 점. 둘째는 고기의 양이 적고 값이 비싸다는 점. 아마 나 혼자였다면 가게를 잘못 찾았다는둥 적당한 핑계를 떠올려서 탈출했을 것이다. 점원이 욕을 할 것도 아니고 욕을 좀 먹으면 또 어떤가. 그러나 체면 있는 어른들은 그런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여 있었고, 심지어 아직은 남의 식구인 손님이 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잃어버린 선택지의 함정 속에서 먹은 한우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그야말로 살살 녹는 맛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맛의 인상이 그렇게까지 또렷하게 남지는 않았는데, 일단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맛이라고 또렷하게 잘 기억하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원이 옆에서 고기를 구워주기까지 해서 맛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기념으로 밥을 사야 하는 처지이면서 비싼 밥을 얻어먹는다는 죄책감도 있었으며, 흠을 보여서 딱히 좋을 게 없는 상대 앞에 앉아 소설과 돈과 소설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정신적으로 피고인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탓도 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줄곧 마장동에 가면 이 돈으로 배가 터지게 먹고도 남는다고 한탄을 그치지 않는데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쓰다 만 공모전용 원고를 마저 쓸 생각을 하면서도 축배를 들어야 했으니…… 마냥 유쾌하기만 한 자리일 수는 없었다. 감사한 것이야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즐기는 일에 길들지 않으면 먹기 힘들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자리가 아무 부담 없이 편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한우를 배불리 먹는 행위에 다소 고통을 느꼈으리라. 나는 식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에 그렇게까지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쓸 돈이 충분치 않으면 형체가 남지 않는 경험에 돈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데, 내가 식생활에 낮은 점수를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성장 환경도 당연히 큰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내가 만약 맛집을 즐겨 찾아다니는 가족들과 살았다면 달랐을까 생각해봐도 답은 회의적이다. 기똥차게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먼 길을 찾아가서 아낌없이 돈을 쓰며 행복을 느끼는 내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식사는 적당히 맛있는 음식을 적당한 가격에 즐기는 게 제일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그런 가치관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나이도 먹고 돈도 잘 벌게 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진귀한 음식을 먹어보려는 경향이 강해진 탓이다. 그러다 보니 슬슬 그들이 무슨 외국 음식 얘기를 꺼내도 십중팔구는 들어본 적도 없어 그게 뭐냐고 되물어야 할 지경이고, 어찌저찌 같이 먹어도 금전적으로나 취향적으로나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끼리 뭐 새로운 걸 먹으려 하면 아버지가  그런 걸 그 돈 주고 먹냐는 식으로 반응해서 김이 샐 때가 많았는데, 내가 바로 그 아버지처럼 되어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나이 든 사람이 진짜 멋있을 때가 맛집을 착착 알려줄 때라는 얘기를 보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거지 같은 개똥철학보다는 실제로 체험해 본 맛집 리스트가 실생활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나는 너무나도 멋대가리 없는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식생활을 경시하니 도통 아는 맛집이 없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저번 주에는 후배가 동네에 놀러왔는데 갈 만한 음식점이 없어서 버거킹에 갔을 정도다. 인근에 사는 다른 후배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으니 이 지역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돌이켜 보면 욕을 먹을 만한 손님 접대였다. 후배님, 미안합니다.

사실 사람이 꼭 맛집을 꿰고 살아야만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고, 훌륭해져야만 인간관계가 성립하거나 살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갖게 된 취향과 개성이 어떤 국면에선 빛을 발하기도 하고 다른 국면에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잘 챙겨 먹는 즐거움을 익혀두지 못한 것을 아쉽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첫째가 좀 그럴듯한 인간이고 싶다는 인정 욕구 때문이고, 둘째가 함께 식사할 상황에서 선택지 마련을 항상 남에게 맡기는 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무임승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보고 느끼기로도 "난 아무거나"라는 말이 선택에 도움이 기억이 거의 없고, 그런 소리가 특별히 고와 보인 적도 별로 없었다. 내가 속한 집단이 뭘 고민하면 그 고민에 한 발이라도 걸치는 게 사람의 도리다. 그런데 나는 오래도록 먹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이유로 그 도리를 저버리고 살았다는 후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맛집 정보가 보이면 스크랩도 좀 해놓으면서 살고자 하는데, 검증되지도 않았고 쓰일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데이터를 그렇게 쌓아두노라면 받을 사람도 없는 선물을 사두는 것 같은 허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버킷리스트를 쌓아두면서 신나는 내일을 떠올리겠지? 그걸 생각하면 역시 취향은 재능이구나 싶기도 하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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