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잠깐 주춤하면서 지독한 여름 날씨가 일찌감치 시작되었는데, 댁내 두루 평안하신지? 참고로 나는 덥고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우울감에 어울리는 배경으론 보통 낙엽과 앙상한 가지와 싸늘한 가을 겨울 바람을 떠올리지만, 이불을 덮거나 차를 마시거나 불구덩이에 뛰어들면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추위와 달리 더위는 사실상 물에 들어가거나 에어컨을 트는 것 말고 대처 방법이 거의 없기에, 잘 따지고 보면 여름이야말로 정말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기운 빠지는 계절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워 죽겠는데 심지어 연말까지 다가오는 남반구의 여름은 두 배로 고통스럽지 않을까…….
아무튼 오늘은 그나마 29도밖에 되지 않아서 에어컨을 틀지 않고 가슴에 아이스팩을 얹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축복받은 날씨다. 하지만 밤새 선풍기 바람에 땀을 증발시키는 한편으로 시간의 흐름과 삶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잔 탓인지 오늘 아침은 오히려 기운이 빠져 기절할 것 같았다. 알맹이는 녹아서 땀으로 배출되고 껍데기만 깨어나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대로 늘어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에어컨을 틀고 간신히 흐물거리던 육체와 정신의 형체를 고정시켰는데, 그로부터 두 시간도 지나기 전에 인류가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앞으로 고작 30개월뿐이라는 유튜브 방송을 봤다. 고통스럽고 암담했다. 에어컨을 쓰면 여름이 더 더워지고, 그러면 모두가 에어컨을 더 오래 세게 틀 테니, 인류가 살아날 길은 아무래도 없는 게 아닐까…….
환경 걱정도 환경 걱정이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집에서 에어컨을 쉽게 틀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중 첫째는 단연코 전기요금이다. 어찌저찌 살다 보니 우리집은 냉장/냉동 설비가 네 대나 있는지라 항상 누진세에 얻어맞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심지어 에어컨은 두 대 모두 낡은 정속형이라 유튜브에서 흔히 말하듯 ‘걱정 말고 틀어놓으세요’에 해당하지 않는다. 언제나 고출력으로 누진세의 대로를 질주한다. 그러니 ‘어휴, 그거 아끼다 병원비가 더 들어요’라고 설득하기엔 대가가 크고, 결국 늘 그렇듯 거실 에어컨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의 초필살기로 남겨두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거실 상황이 이러니까 방에 있는 나도 내킬 때 에어컨을 켜는 게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확장 공사를 한 탓에 거실보다 2도쯤 더 더운 내 방에서 에어컨을 트는 것은 낭비라고 할 수 없다. 생산성을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합리적인 대처일 것이다. 계측해본 결과 내 방에서 하루 8시간씩 한 달간 에어컨을 사용하면 요금이 23000원 정도 나온다. 이 정도라면 육체와 영혼의 안녕을 위해 충분히 낼 만한 금액이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도 선풍기로 잘 버티는데, 나 같은 게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내가 무슨 생산성을 따질 정도로 잘났나 하는 생각이 몰려들기에, 죽겠다 싶을 정도가 아니면 좀처럼 에어컨을 틀 수 없는 것이다. 내 방이 가장 덥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심정은 어쩔 방도가 없다.
그래서 올여름에는 에어컨 대신 아이스팩을 자주 쓰고 있다. 냉동실에 얼린 아이스팩을 꺼내와서 천 주머니에 넣은 다음 몸에 대서 체온을 낮추는 것이다. 사실상 일사병 대책이다. 여러 부위를 실험해본 결과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겨드랑이로, 활동도 심하게 방해받지 않고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허벅지 안쪽도 제법 나쁘진 않은 편이지만, 허벅지를 붙이고 있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뒷목도 익히 알려져있듯 시원하긴 한데 아이스팩을 고정하기가 어렵다는 게 큰 단점이었다. 발바닥은 서늘해진다기보다는 발바닥이 차다는 느낌이 지속되는 것에 가까워 아주 쾌적하다고 할 순 없었다. 발바닥이 늪에서 막 기어나온 양서류처럼 축축해져서 돌아다니기 어려워지는 것도 문제였고.
그런데 고군분투하며 시간을 보내 보니 아이스팩의 냉기가 유의미하게 지속되는 것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때마다 냉동실의 예비 아이스팩으로 교체해야 했는데, 아이스팩의 내용물은 물보다 어는점이 낮은지라 넣은 후 예닐곱 시간은 지나야 다 어는 듯했다. 즉, 아이스팩이 대여섯 개는 있어야 계속 교체하며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가진 아이스팩은 네 개뿐이니 사이클이 딱 맞지 않는다. 다 얼기 전에 꺼낸다고 못 쓰는 건 아니지만, 잠깐만 있으면 시원한 기운은 사라지고 미지근하게 식은 슬라임 시체를 매달고 다니는 기분이 된다. 시중에서 파는 ‘얼음 조끼’ 리뷰 중에 ‘시원하긴 한데 아이스팩이 오래 못 간다’는 것이 있더니, 바로 이런 뜻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선풍기의 위치와 각도를 조절하거나, 창문 여는 방향을 바꾸거나 창가에 선풍기를 한 대 더 놓는 등의 갖은 지혜를 다 짜내보기도 했지만 드라마틱한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중기관총을 놔두고 새총으로 전쟁을 치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도 문제였다. 효도도 환경보호도 좋지만 건강을 갉아먹으면서 1시간 걸릴 작업을 2시간씩 한다면 이것도 측량이 어려워서 그렇지 개인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손해가 아닌가 싶었다. 겨울 난방 온도는 22도로, 여름 냉방 온도는 27도나 28도로 맞추고 사니까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죄책감을 가질 수준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나 하나쯤이야’라는 변명의 다른 형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작년에 주민센터에 선풍기를 세 대나 기증한 것을 떠올려보면 역시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필요하다면 나를 더위로부터 구출하는 데에 에어컨을 동원하기로 했다. 다만 거실 상황은 여전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괜찮아도 조만간 닥쳐올 폭염 앞에서 내 방만 생존 가능한 지역이 되면 그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게 분명했고, 거실 에어컨이 지나치게 넓은 구역을 냉각시키기 시작하면 그것도 여러모로 마음에 걸릴 게 뻔했다. 무시무시하게 열을 뿜는 냉장고들을 에어컨으로 다시 식혀주는 꼴은 분명 문제가 있으니까. 그래서 거실을 별개의 공간으로 분리할 방법을 알아보는 중인데,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듯, 이걸 쓰면 만사 해결이라는 식의 상품(미션 임파서블에 나왔던, 벽과 천장에 딱 맞는 칸막이 따위)은 나와있지 않고, 커튼을 다는 게 그마나 타협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커튼을 다는 것도 비용이 드는 일이고, 이 집에 얼마나 살지도 알 수 없으며, 에너지 절약이 얼마나 되는지는 재보기 전에는 또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렇게 가치가 있는 일일까?
답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고, 행동에는 비용이 들어가며, 더위는 시간이 지나면 물러간다. 결국 가장 뜨겁고 눅눅한 보름이 어찌저찌 선풍기 바람을 타고 지나간 뒤에는 모든 고민과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거실은 다시 오브제가 된 에어컨 앞에서 평화를 누릴 텐데, 에어컨을 틀어도 되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낼 가능성보다는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저절로 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이 춤추는 계절 속에서 씁쓸하게 느껴진다.
(2022.07.09.)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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