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저찌 2012년쯤부터 맥북을 쓰기 시작한 뒤로 매킨토시에 눌러앉아 지금껏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윈도우즈를 돌리는 일반 랩탑 대신에 맥북 에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개인출판으로 아이북스에 책을 내보자는 쓸데없는 꿈 때문이었는데, 출판사까지 등록하면서 법석을 떨고도 여지껏 1센트도 정산 받지 못했으니 역시 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애플 제품이 다 그렇듯이 익숙해지면 빠져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서, 2017년쯤에는 맥북에어 1세대로 더 버티긴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도 또 맥북 에어를 골라 2012년 중순 모델로 갈아탔다. 그때가 정말 도망칠 기회였는데……. 아무튼 당시에는 ‘셀잇’이라는 중고 매입/거래 앱이 괜찮았기에 그것으로 좋은 매물을 찾고 정자역까지 두 시간을 가서 거래했다. 거래 상대는 적당히 말끔하지만 지친 40대 남자로, 자신이 보기 드문 8기가 램 옵션의 맥북에 보호 필름도 깔끔하게 붙이고 잘 썼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가 가져온 물건은 말끔하고 아름다웠으며, 같은 사양 중에서 8기가 옵션은 대단히 찾기 어려웠다. 물건을 확인하고 앱을 통해서 42만원을 송금한 게 곧바로 처리되지 않아서 돈을 한 번 더 입금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논하던 차에 송금 처리가 되는 해프닝이 생겼던 게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이후로 이 2012mid 모델은 나와 함께 몇 년간 다양한 도서관을 누비며 소설 작업, 번역 작업, 보드게임 제작 등등 온갖 작업에 혹사당했는데, 고질적인 용량 부족이 갑갑해서 작년에 전용 공구(애플은 두 종류의 별 나사라는 야비한 방법을 채용했다)와 호환 젠더 같은 부품을 구해다 SSD를 500기가로 교체했다. 여름에는 배터리가 더는 버티기 힘들어하기에 부품을 사다 직접 교체했고, 아무래도 발열이 스트리밍 속도 저하로 이어지는 것 같아 써멀구리스, 써멀패드 작업까지 열심히 했다. 모두 확실한 효과가 있는 조치들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돌본 덕인지 나의 맥북은 별 문제 없는 메인 기기로 줄곧 활약해줬는데, 2021년 가을이 되자 종종 그래픽이 깨지며 재부팅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전기나 발열문제인 줄 알고 청소만 다시 해줬다. 하지만 12월이 되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다운되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어떤 용도로도 신뢰할 수 없는 셈이다. 초조해진 나는 이 증상을 검색도 해보고, 커뮤니티에 물어보기도 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2012년 언저리의 모델에는 공정 문제가 있어서, 오래 사용하다보면 열 때문에 납땜이 느슨해지고, 이로 인해 다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미로 가열해서 수리하는 사람도 있긴 했으나 그건 너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고, 납땜된 CPU를 따로 수리할 순 없기에 메인보드를 아예 교체해야 하는데 가격은 28만원쯤 한다고 했다.
아무리 정든 모델이라도 40만원에 산 구형 기기를 28만원에 수리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낙담하고 이 기회에 평범한 랩탑을 살까 고려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니 또 막막하기만 했다. 선택지가 너무 다양했다. 게임은 거의 안 하니까 고사양까진 필요없는데, 그렇다고 너무 싼 걸 샀다가 스트리밍 배속 조절도 제대로 안 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윈도우즈 환경으로 갈아타면 내가 뭘 잃고 뭘 얻는지부터 감이 오지 않았다. 수 년간 하나씩 찾아내고 세팅해서 맞춘 프로그램이 한둘이 아닌데 이걸 다 잃는 것일까? 그걸 어느 정도까지 다시 구현할 수 있을까? 윈도우즈를 안 쓰고 사는 건 아니니까 금방 적응이야 하겠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가장 많이 쓰는 일기 앱을 모바일 환경으로만 관리할 수 있나? 텍스트 작업에 쓰는 스크리브너도 윈도우판은 어째 좀 안 좋아보이던데 사서 쓰면서도 짜증이 나면 어쩌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맥북은 일단 돌아가긴 했으므로 나는 틈틈이 백업을 해대며, 이 물건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만약 당장 맥북 하나 박살난다 해도 데이터가 다 날아가거나 맥 환경을 영영 다시 접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기존 세팅을 구현하려면 오만가지 처참하고 귀찮은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쓰러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더 낡은 소니 노트북과 구형 맥북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는 있으나, 맥 환경 안의 가상머신으로 돌리던 윈도우즈를 소니 노트북으로 옮기고 맥 데이터는 맥북으로 옮기고……. 전문 지식도 없이 그런 짓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한다는 건 정신적으로 파탄나는 작업이 아닌가……. 공인인증서 전쟁보다 몇배는 가혹하고 끔찍한 작업량을 예상하자니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도 맥북은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적잖이 딴 얘기지만, 나의 2021년 연말은 맥북 문제를 빼더라도 최악이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스템이 처참하게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돈도 일거리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열심히 쓴 소설들은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공모전이라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갔다. 시간이 기대와 다르게 움직였다. 이제 금방 날아오른다고 비행기에 연료를 넣었는데 시동을 걸려고 보니 탱크에 구멍이 난 듯한 기분이었다. 살아가는 시스템을 바꿔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맥북에서 윈도우즈 랩탑으로 갈아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쳐서 12월부터 내내 오로지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연말 모임에서는 필사적으로 훌륭하고 유쾌한 인간 시늉을 해야 했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신저 단체방에는 답을 하지 못했으며, 어제는 형의 결혼의 전주곡인 가족 모임을 하루종일 하게 된 데다, 오늘 새벽 꿈에는 십수년 전에 헤어진 이후로 어느 때보다 신나게 잘 살고 있는 전애인이 나왔고, 오늘 오후에는 또다른 친족 모임을 피해서 카페에 나와야 했다. 옆자리 사람들은 먹고사는 얘기나 연애 얘기를 하기도 하고 애한테 태블릿으로 뭔가를 보여주며 책을 읽기도 했는데, 옆에서 돈이 되지 않는 글을 두드리자니 곱게 죽는 것 말고는 새해 복이랄 게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맥북 얘기로 돌아가서, 맥을 떠나거나 떠나지 않기로 정하기 전에 정확한 수리비를 알아보기나 해야했다. 내가 만날 것이 얼마짜리 지옥일지는 궁금했으니까. 한 번 가봐서 신뢰하던 사설 수리업체에 전화를 해봤다. 노련한 기사님은 상황을 듣고는 11만원 정도 들 것이라고 답해줬다. 11만원으로 그 머리 터지는 상황을 해결하고, 익숙한 데다 별 문제도 없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애초부터 괜히 이쪽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좋았겠다는 후회와 자기 비하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아주 저렴한 대가다. 이것도 새해 복이라면 복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무난하게 희망찬 방향으로 흐르자면, 삶에도 어딘가에는 해법이 있기 마련이니 겁먹기 전에 잘 알아보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라거나, 긍정적인 자세가 뭐 어떻다는 소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번에 느낀 것은 그렇게 건설적인 교훈이 아니라, ‘어떠한 삶의 체계는 유지의 합리성을 논하는 것조차 아주 어려워서 깨끗이 갈아치우기가 불가능하고, 결국 적당히 땜질하면서 정붙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의 체계가 이루는 방향성이 나답게 살려하는 존엄성과 연계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맥을 쓰든 윈도우즈를 쓰든 아무거나 적당히 잘 써서 생활하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삶의 방향이 존엄성과 연계되어 있다는 생각은 인지적 오류라고 지적한다면 그것도 분명 맞는 말이겠으나, 누군가는 내 몸에 꼭 맞는 고통을 찾아가야만 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아무튼간에 내 삶에도 내 삶을 유지할 저렴하고 말끔한 답이 거짓말처럼 찾아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최소한 그런 답을 기대하고 찾아다닐 만한 기력이라도 돌아오길 바란다. 끝으로 연말에 했어야 하는 말인데, 이 시답잖은 잡문을 오래도록 읽어주신 독자분들께도 막연한 행복보다는 자기다운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답이 별빛처럼 찾아오길 바랍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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