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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22. 2022

돈 쓰지 않고 덕질하는 마음

‘덕질’이라는 게 이제는 너무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되는 바람에 어원이 원래 오타쿠에서 나왔다는 둥 오타쿠가 일본어의 뭣에서 나왔다는둥 설명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도나도 무슨 덕질을 하네마네 하고 뉴스레터 따위에서도 MZ세대의 취향을 알아내어 무슨 덕질을 어떻게 시키네마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대의 변화가 신기하달까,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것에 속는 기분이랄까……. ‘츤데레’라는 단어가 널리널리 퍼져서 너무 당연시된 나머지 일본인한테도 ‘오, 츤데레라는 말도 알아?’하고 놀라서 묻는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위 문화가 퍼지는 모습은 언제나 놀랍다.


아무튼 어떤 단어가 유행한다면 그 단어가 사용되기에 딱 맞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이 뭔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붙들고 관련된 상품을 사모으거나 영상을 찾아다니는 풍조가 별스러울 일도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덕질이라는 행위에 단어가 찾아왔다는 추측이 맞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정작 덕질이 무엇인지 시원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워졌다.


인터넷 사전 ‘우리말 샘’에는 덕질이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인터넷 사전의 신뢰도는 높지 않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정의 같다. 나도 덕질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꼽으라면 뭔가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돌을 좋아해서 그 아이돌 소식을 찾아보고 영상을 모으는 것도 덕질이 맞고, 게임을 좋아해서 그 게임의 공략법을 찾아보고 피규어를 사는 것도 덕질이 맞다.


덕질에도 자격은 있는가?


다만 정보만 찾아보고 돈은 쓰지 않는 것도 덕질이 맞는가 따져보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근래에 내가 품게 된 소소한 고민도 바로 이것이다. 나는 요즘 모바일 게임 몇 개를 ‘관리만’ 조금씩 하면서 소비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수준의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관련된 공식 이미지와 팬아트는 제법 열심히 찾아보고 수집해서 배경화면으로 쓰고 있다. 숨길 일도 아니니 털어놓자면 특히 ‘아이돌 마스터 샤이니 컬러즈’, ‘원신’, ‘블루 아카이브’가 바로 그런 게임이다. 자랑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 게임들 자체에 대한 애정은 그리 크지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손이 많이 가는 게임이라 열심히 덤비기 힘든 탓이다. 자연히 고군분투했는데도 돌파하지 못한 벽 같은 걸 느끼지도 못했고, 어떤 캐릭터에 대한 불타는 소유욕을 느끼지도 못한지라 돈을 쓰지도 않았다.


반면에 ‘그랑사가’는 그래픽이 아름답고 스토리도 그럭저럭 호기심이 생기는 데다 손이 별로 안 가는 게임이라 제법 열심히 하고 있고, 아트웍이 마음에 든 나머지 수익금을 기부한다는 한정판 아트북을 사기도 했다. 다른 게임을 다 접더라도 이것은 어떻게든 오래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랑사가에 대한 정보도 딱히 찾고 있지 않고, 팬아트는 있으면 보겠지만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게임에 대해 얼마나 덕질을 하고 있는가……. 나 스스로 직관적으로 느끼기엔 ‘아이돌 마스터 샤이니 컬러즈’, ‘원신’, ‘블루 아카이브’는 덕질을 하고 있고 ‘그랑사가’는 그냥 즐기는 정도인 것 같다. 마음이 그렇다. 영화도 아주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재미있고 끝나는 작품이 있고, 갖가지 방법으로 ‘되새김질’하는 작품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위에는 ‘정보 수집’이 덕질의 가장 큰 요소인 것 같다고 써놓긴 했지만, 실제로는 콘텐츠를 얼마나 열심히 즐기는지, 즐길 방법을 찾는지와 무관하게 ‘되새김질’을 하느냐 마느냐가 덕질의 영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에게 되새김질이란 대체로 ‘2차 창작 영역에 들어가 노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기준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아마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서브컬처에 발을 들이고 2차 창작 즐기길 당연시해서 생긴 인식이리라. 그리고 스스로 어떤 기준을 세우고 자신이 덕질을 한다고 인식한다고 해서 만사 해결도 아닌 것이, 정보를 수집하고 2차 창작 영역에 들어가 노는 것으로 덕질의 핵심 요소를 충족했다 해도 그것만으로 떳떳해지진 않기 때문이다. 나처럼 돈 한푼 안 쓰는 것도 모자라서 사실상 로그인만 하고 이미지를 배경화면으로 쓰며 ‘덕질 중’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좀 민망스럽고 부끄럽다. 모바일 게임에는 무료 이용자도 필수적인 존재라지만 아무래도 하나의 사회 시스템에 무임승차한 듯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덕질이란 좋아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2차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성립하긴 하지만 지속가능해야 떳떳하고 바람직한 취미가 되는 듯하다. 나의 덕질이 대상 문화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데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바일 게임을 할 거면 무조건 현질은 해야지’라는 주장은 과한 것이지만, 자신의 덕질이 이 문화의 유지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은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괜찮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있으면 자기 상황에 맞춰 놀다가도 적당한 기회가 되면 관련 상품 하나라도 사게 될 테고, 결과적으로 덕질이라는 소박한 유희가 앞으로도 유지되거나 한층 더 흥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구매하지 않는 나의 덕질은 부채감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낙제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로 대충 만족하고 살자는 얘기는 아니니까, 최소한 남들이 알게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이나 하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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