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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02. 2022

가족의 결혼식과 그 뒤의 정경

저번 주에 형이 결혼했다. 형수님을 작년부터 꾸준히 종종 봐왔고 결혼 준비 얘기도 계속해서 들으며 운명을 받아들였기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사실 지금도 별로 실감 나진 않는다. 당장 내 처지가 변한 것은 아니니까 실감이 어쩌니 저쩌니 따져봤자 무엇에 대한 실감이라고 거론할 게 별로 없지만…….


아무튼 결혼식이라는 것은 참 야단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식 한참 전부터 오갔던 예식장 예약과 선물과 기타등등의 크고 작은 문제거리들을 다 생략해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결혼식 당일까지도 나는 공모전용 단편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 대규모 가족 행사에 뛰어들 마음의 준비도 실감도 없는 한편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올 게 왔을 뿐인데 내가 실감이고 뭐고 따질 이유가 있나 싶으면서도 아무것도 잘 하지 못했다. 그러다 심판의 시간이 되어 양복을 차려입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마음까지 굳어졌다가 구두를 신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신은 구두는 당장 밑창이 깨져서 떨어지고 말았다. 알아보니 폴리우레탄 밑창은 수명이 4년 정도로, 공기중의 수분을 흡수하여 박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했다. 어쨌든 당장 나가야 할 판에 구두가 박살났으니 이만저만 난처하지 않았고, 진작 신어봤어야 할 게 아니냐고 욕도 좀 먹었다.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와 발 사이즈가 엇비슷해서 아직 살아있는 구두를 빌려 신고 출발했다가, 스마트폰을 두고 나온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가 챙겨 나왔다. 시작부터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예식장이 가까워서 가기는 금방 갔다. 도착한 뒤로도 이상한 심정이었다. 삼촌과 사촌 누나가 먼저 와서 인사했고, 신부 대기실에 갔다가 사진을 찍는다기에 쫓겨났고, 혼주 대기실에 있다가 곧 나가서 삼촌과 그의 맏딸과 함께 앉아 축의금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는 사촌 형이 도와줄 예정이었는데 큰아버지가 급히 입원하며 아침에 예정이 변경된 것이다. 혼주가 되어도 이상할 건 없는 나이의 삼촌과 이런 일을 하긴 죄송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사촌 누나들이 도와줬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안은 자연스럽게 고려되지 않았다. 어째선지 축의금 받는 일은 남자가 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는 탓이다. 어째서일까? 중요한 일이라? 아니면 도난을 막으려면 남자가 나아서? 나중에 잘 생각해보니 결혼식이 외주화 되기 전에는 여자들이 음식 장만 등으로 바빴을 테니 그밖의 일인 축의금 수납을 남자가 하게 된 게 고착화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사촌 동생이 도운 덕에 나는 이 날 축의금 수납처에 여자가 앉은 것을 처음 봤다.


이야기를 되돌리자. 축의금을 받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단순하지만 상당히 바쁜 일이고, 그 사이에 누가 와서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거나 언제 안정적인 일을 할 거냐는 식으로 잔소리를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번잡한 도피처에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의 결혼식도 아니고 친형의 결혼식인데 보긴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한참 뒤에 양해를 구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을 때쯤 들어가서 친척 누나들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가족석은 한참 앞에 있었지만 행사 중간에 거기까지 가긴 뭐했다. 결과적으로 행사를 사실상 스크린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래선지 남의 결혼식과 별반 차이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장이 가로로 넓어서 먼 만큼 남의 결혼식보다 임장감이 덜한 느낌도 있었다.


아무튼 방송반 디제이와 윈앰프 개인방송이 유행하던 시절의 실력을 살린 편지 낭독은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친동생이 듣기에도 그랬는가 하면 물론 이견이 있지만, 결혼식에서 낭독하는 편지가 담백하길 바라는 것은 잘못이리라.


다음으로는 아버지가 엄숙하지만 노련하지는 않은 듯하게, 마치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오른 교장처럼 혼인이 성립했다는 취지의 선언을 했다. 글로 하는 말은 점잖지만 입으로 하는 말은 다소 야박한 아버지가 재치를 발휘하지 않은 것은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 뒤에는 사돈 어르신이 올라와 덕담을 했다. 기분이 너무나 좋다는 그는 정말로 당장 어깨춤이라도 출 것처럼 웃고 있었다. 자식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 명절 모임에서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딸이 결혼한다는 게 그 정도로 기쁜 일인지 순수한 의문이 생겼다. 결혼식장을 자주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즐거워하는 혼주는 처음 보았다. 슬퍼하는 것보다야 훨씬 좋은 일이지만, 자식을 결혼시키는 게 그 정도로 기쁜 일이라면 나는 그런 평범하고 거대한 기쁨을 부모님께 결코 선사할 수 없을 팔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겠구나 싶어 덩달아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타인과의 결합을 추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주객전도가 아닌가 싶고.


아무튼 덕담의 취지는 참으로 기쁘고 든든한 아들이 생긴 것 같아 감사하다는 정도였고, 끝에는 빨리 아이를 낳으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결혼했다는 선언을 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당장 아이를 가지라는 말은 지나치게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것으로 느껴져 안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혼하는 당사자보다 더 신이 난 모습 때문인지 그럴 수도 있는 개그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통적인 결혼은 주례가 반지 교환도 시키고 키스도 시키고 하는데 요즘은 별로 못 본 것 같기도 하다. 이날도 양가에 인사를 하고 축가를 듣는 순서로 이어졌다. 첫 곡은 사돈댁 둘째딸, 즉, 형수의 동생이 불렀다. 음악가처럼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녀는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곡을 불렀는데, 축가를 부업이나 생업으로 삼아도 될 만큼 실력이 대단했다. 순수히 감탄했다. 이날 예식장이 청각적으로 가장 빛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축가는 신랑이 직접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을 불렀다. 나도 옛날에 즐겨 부르던 곡이라 잘 아는데, 감미로운 꽃길로 시작해서 피투성이 가시밭길로 빠져드는 곡이고, 심지어 길다는 문제도 있어서 시작부터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노래는 걱정한 그대로 흘러갔다. 형은 밴드 보컬이었던 경력이 있지만 예전같진 않았다. 하기야 요 2년 반 동안 누가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중에 사돈댁까지 두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노래는 사돈댁이 낫더라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금 지나서 후회했다. 전국노래자랑도 아니고 나중에 만회할 수 있는 성질의 이벤트도 아닌데 비평을 해서 누구에게 좋을 일이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런저런 순서를 거치고 신랑과 신부가 순백의 값진 꽃으로 장식된 길을 행진했다. 신랑이 입장할 때는 에반게리온 발진 사운드 트랙이 나왔는데 행진할 때는 라라랜드의 오프닝이 나왔다. 이것도 전적으로 형의 취향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알아듣는 자신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족은 분리되고 삶은 변화하는 만큼 앞으로는 형이 무슨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가족이 사회 속에서 어떤 페르소나로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게 보통인 만큼 그게 정상적인 방향일 수도 있겠다.


행진 뒤에는 당연하게도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어쩌면 결혼식이라는 행사의 의미의 절반 정도는 거기 있다고 봐도 아주 과언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허겁지겁 걸어가서 마스크를 벗고 섰다. 보진 못했지만 마스크를 벗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코로나 확산세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상당히 긴장되었지만 나야 걸려도 별반 차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탓에 신비한 닌자 집단처럼 보이는 상태로 신랑신부를 향해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어대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가족 사진 촬영 뒤로는 친구들 촬영이 있었으므로 나는 곧장 접수대로 가서 삼촌 일가가 마무리한 축의금을 챙겼다. 결혼식을 덜 보고 일을 더 도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죄송스러웠는데, 바꿀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결혼식은 일단 끝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게 결혼식의 전반에 불과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연회장에서 바쁘게 인사를 하고 다녔고, 한참 뒤에 나타난 신랑 신부도 인사를 하느라 바빴으며, 나도 친척들과 합석하여 인사를 몇 번씩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내가 상을 받은 공모전의 수상작품집이 비교적 최근에 나온 덕에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정신과를 알아볼 때 쓴 단편이 1년 뒤에 작가라는 명예직을 줘서 악의 없는 호구조사로부터 살짝 벗어나게 해줬으니, 그 작품 ‘자애의 빛’이 자식이라면 효도는 할 만큼 해줬지 싶다. 다만 데뷔작을 비롯한 여러 다른 작품들은 없던 일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쓴 단편 하나로 어른들께 작가 소리를 듣는 일은 민망하고 씁쓸하며 약간이나마 성공한 자식 하나만을 둔 부모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누가 소설 쓴다는 소식을 곱게 봐주는 어른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아주 높은 어르신 한 분은 그러지 말고 꼭 취직하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이 탕아 좀 보라는 식으로 나를 친척들에게 끌고 가기도 했는데, 이때도 수상작 얘기를 들은 친척들은 책도 낸 작가인데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방어해 주었다. 어르신도 그 말을 듣고는 더 길게 말하진 않게 되었고, 화제도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전후의 잿더미에서 삶을 일궈온 어른들에겐 소설을 쓴다는 한량과 상을 받고 책을 낸 작가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한편으로 그 어르신의 훈계가 합리적인 방향에 가깝다고도 생각했다. 아무튼 그 시간은 짧았지만 내 마음 깊이 상처나 혹은 어떤 종류의 흔적을 남겼고, 그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호들갑이 아니라 예전에 장례식장에서 차여본 적이 있어서 잘 안다. 특별한 장소에서 날아온 칼날은 합당한 것이든 아니든 그 순간 주변의 공기와 나의 심장박동까지 영혼에 새겨놓는 것이다.


그렇게 맛있게 먹긴 힘든 식사를 마치고 연회장을 나설 때는 몇 년만에 만난 외삼촌이 너도 빨리 결혼을 해야 부모님도 편해질 게 아니냐고 매서운 타박을 했다. 이 또한 보기 드문 직구였는데, 나를 방어할 수단은 없어서 그냥 맞아야 했다. 무례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외삼촌은 얼마 전부터 폐암 치료중이었는데, 발견이 빠르진 않은 편이었다. 그는 의사들이 확률로 논하곤 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을 테고, 자식이 빠르게 가정이라는 생존 시스템을 이루고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 편안한 삶의 순환이고 섭리라고 느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는 자의 유전자는 후대에 잘 남지 않으니 과학적으로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이리라.


식사가 끝나자 많은 이들이 빠르게 떠나갔고, 행사의 당사자들만이 남아서 막대한 식사비를 치르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서로를 축복하고 감사한 뒤 각자의 차를 타고 해산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양복을 벗고, 씻고, 허리 보호대를 찬 뒤에, 세다가 넌더리가 날 만큼의 보기 드문 현금을 세어 표로 기록하고, 총액을 맞춰보고 정리하고 보고했다. 많은 곳에서 모인 돈은 대부분이 뿌린만큼 되돌려 받은 것이었는데, 냉정히 생각하면 물가가 올라서 손해였고, 따뜻하게 생각하면 가족들이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이래저래 챙겨온 만큼 받은 축하였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감당하기는 벅차고 무거워 보기에 두려운 돈이었고, 내가 이만큼 넓은 그물 같은 온정을 받기란 죽어서도 불가능할 텐데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정상인인가 싶은 그릇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돌아온 뒤에 하기에 적합한 생각은 아니라 생각을 그만두고 쉬기로 했다. 적합한 생각으론 헌 가족과 새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것이 있었다. 나는 가급적 그 생각을 하며 쉬었는데, 빠르게도 돌아오는 명절을 생각하면 잘 쉬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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