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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02. 2022

좋은 선물 주기의 난해함



재미있는 영상 중에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닌텐도 64 키즈’로 유명한 영상이 있다. 영어권의 어린 남매가 닌텐도 64를 선물받은 직후의 반응을 찍은 홈비디오인데, “우워어어어!! 닌텐도 씩스티 뽀오오!!” 하면서 열광하고 팔을 휘두르며 보여주는 환희의 끝이 그야말로 인상적이다. 닌텐도 64가 이렇게 큰 기쁨을 준다고 닌텐도에서 광고로 써도 될 지경이다. 실제로 그 영상의 주인공들이 장성하여 같은 구도로 찍은 것은 엉뚱하게도 패스트푸드인 타코벨 광고였지만, 아무튼 그 홈비디오를 보자면 선물을 주고 받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멋진 선물을 받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받는 이가 기뻐서 광기 어린 소리를 지를 정도로 훌륭한 선물을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 받는 이가 그렇게 기뻐해준다면 얼마짜리 선물이라도 지출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적인 선물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멋진 선물의 요점은 역시 상대가 스스로도 갖고 싶었던 줄 몰랐던 물건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평소에 ‘저거 있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언급했던 것을 기억했다가 주는 일도 멋지지만, ‘뭐야, 이거? 이런 게 있었어? 짱인데?’ 하고 반응할 만한 선물을 주는 게 제일이다. 나는 그렇게 감탄스러운 선물을 꼭 한 번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만화 잡지의 부록이었다. 그 선물을 받을 때쯤 나는 ‘아마가미’라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빠져 있었는데, 그 꼴을 가까이서 보던 후배들이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잡지와 부록을 사다준 것이다. 잡지 자체보다 부록이 더 감탄스러웠던 이유는 그 호에 아마가미 특집으로 게임 내에 나오는 가상의 잡지를 구현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제목은 무려 ‘로우 앵글 탐정단’. 미녀들을 낮은 각도에서 촬영해서 하반신을 중심으로 몸매를 부각한 사진을 주로 싣는 야한 잡지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내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고, 나는 그런 게 실제로 만들어진 줄도 몰랐는데 선물로 받게 된 터라 그야말로 탄성을 지를 정도로 놀라며 기뻐했다(내용 때문에 기쁜 건 아니었다). 그런 선물은 평생 한두 번이나 받을까 말까가 아닌가 싶다.


그런 선물을 내가 준 것도 꼭 한 번 있다. 지금은 헤어진지 한참 된 여자친구와 사귈 때 화이트데이를 기념하여 뭘 줄까 고민하던 끝에 그녀가 천하장사 소시지를 좋아한다는 것에 착안하고 당시에 흥행하던 일본 TV애니메이션 ‘코드기어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천하장사 포장처럼 만들어 붙여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개그가 적중하여 여자친구는 카페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폭소하고 말았다.


어째 써놓고 보니 다 서브컬처 관련이군. 아무래도 선물을 받는 쪽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선물이 쉬워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 아주 흥한 콘텐츠거나 대중적인 분야라면 관련된 상품도 많으니 선물하는 쪽이 골라서 주기도 좋고 받는 쪽도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느끼기 쉽다. 다만 받는 쪽이 해당 분야에 너무나 압도적인 돈을 붓는 사람이라면 뭘 사도 이미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깜짝 선물을 주기는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먼 옛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에베루즈’에서 독서가 미소녀의 생일 선물로 책을 선물한다는 선택지를 고른 적이 있는데, 이때도 그녀는 이미 있는 책이라고 실망한 기색을 보여 땅을 치고 후회하며 로드한 적이 있었다. 아주 교훈적이었다. 이래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선물하는 쪽이 선물 받는 쪽의 취미나 취향에 대해 아주 조금만 알면서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선물이 실망스러워질 가능성이 높다. 후배 한 명이 겪은 일인데, 결혼한 형 부부가 해외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며 ‘너 이런 거 좋아하지?’라며 그 친구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을 줬다는 것이다. 영화만 해도 ‘너 영화 좋아하지?’하고 아무 영화의 관련 상품을 준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일로 느껴지는 법인데, 어쩐지 서브컬처 계통은 폭이 넓든 말든 ‘그런 거’ 정도로 묶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러면 선물을 받고도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니 뭘 선물하려거든 일찌감치 그만두고 뭘 주면 좋을지 물어보는 게 나으리라.


포장지까지 신경써서 선물할 일도 요즘은 퍽 드물어졌다


그런데 한 10년 전부터는 정례적으로 주고받는 선물인 생일 선물을, 주는 쪽이 골라서 주는 경우가 크게 줄어든 것 같다. 대체로 필요한 것을 물어서 사주거나 아예 현금 혹은 상품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주고받을 일이 사라져 합리적이고 좋긴 한데, 주는 쪽에서도 이것을 좋아할 것인지 가슴 졸이며 고민해서 주는 즐거움이 줄었고, 받는 쪽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는 기쁨이 줄고 말았다. 그런 한편으로 여행 선물 등의 사소한 선물은 여전히 깜짝 선물로 주고받는 것을 보면, 큰 선물이 ‘실패 없는’ 방식으로 바뀐 데에는 내 주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는 선물의 가격대가 경제력과 함께 올라간 탓이 제법 크지 않나 싶다. 하기야 비싼 돈을 지불한 선물이 허사가 되는 일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한 심리다. 어지간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부자 얘길 하고 보니 떠오르는 소설 장면이 있다. 아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권이었을 것이다. 갑부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자책이 꽉꽉 들어찬 아이패드를 아주 가볍게 선물하고, 여자 주인공은 그가 도서관을 통째로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진심으로 감탄하는데…… 읽어야 할 책에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짓눌릴 것 같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사는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공감이 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이패드라는 값진 기기 자체는 고맙겠지만.


그나저나 10월에는 내 생일이 끼어 있었기에 그 즈음에 만난 후배들에게 밥을 사려 했다. 그런데 후배들은 생일이면 얻어먹어야지 왜 밥을 사죠? 하고 내 의도와 반대로 내 몫의 밥값까지 내주었다. 분명 합리적인 얘기지만 오래도록 친하게 지낸 선배로서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어색하고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나의 사고 방식이 고루한 것일까, 아니면 후배들의 사고방식이 선진적인 것일까? 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마침 10월생이라 나와 함께 엉겁결에 밥을 얻어먹은 후배 한 명이 미안했던 것인지 얼마 후에 선물이라고 나에게 카페 이용권을 선물해 주었다. 이것도 미안스러워하면서 받게 되었다. 그후 어찌저찌 정신없이 지내다 순식간에 그 친구의 생일이 돌아왔는데, 선물을 고르기 시작하고 보니 누군가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게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나는 약간 즐거웠고, 동시에 상당히 난감했다. 30대 여성에게 줄 선물로 괜한 물건이 아니면서 유용하고, 그런 한편으로 로맨틱한 뉘앙스가 없는 선물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뉘앙스야 결과적으론 갖다붙이기 마련이겠으나 목도리 등의 방한 의류따위는 대단히 친밀하지 않은 다음에야 선물용으로 부적합하다는 건 아무리 무지한 나라도 아는 일이고, 그렇다고 가장 무난하게 쓸 수 있을 상품권은 내가 극히 최근에 받은 탓에 고스란히 돌려주는 꼴이 되어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제빵과 아이돌 덕질이 주요한 취미인 친구인데 내가 그 취미의 깊이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어서 그 방면으론 검토조차 어렵고, 공통 분모인 보드게임을 주자니 모임에 갖고 나오라고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메신저에 연동된 선물 코너에서 인기 있는 것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창의력이 바닥났구나 싶어 약간 암담해졌지만 아는 게 없으면 전과라도 뒤져봐야지 어쩌겠는가? 그렇게 내가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무난한 선물의 정점이라고 해도 좋을 핸드크림 샘플러였다. 핸드크림이란 계절에도 맞고, 자기 돈으로 괜찮은 것 여러 개를 시험하기란 좀 아까운 감이 있는 법이라 선물로 적절하긴 하다 싶었다. 게다가 향에 대한 취향도 최대한 여러가지 향을 모아놓음으로써 극복했으니,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다만 선물은 역시 별 의미도 무게도 없이 대수롭지 않은 것을 느닷없이 주고받는 게 재미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놀러갔다가 선물 가게에 있길래 샀어.’ 하는 식으로. ‘캘리포니아에 출장 갔다가 당신 생각이 나서 특산품을 샀지.’ 하고 아이패드를 건네주는 것보다는 도쿄 바나나나 제주 감귤 초콜릿 따위를 꺼내서 같이 먹는 게 마음 편하고 좋다. 물론 아이패드를 준다면 받기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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