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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초음파 세척기와 매너 좋은 판매자

by 이건해



몇 주 전에는 전기 면도기들을 주웠다. 내가 써놓고도 정신나간 소리 같은데, 누군가가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에 전기 면도기 세 개를 봉지에 담아서 내놓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을 보고 내가 번민 끝에 주워온 것도 사실이다. 면도기는 피가 묻는 물건이라 가족이 쓰던 것이라도 공유하지 않는 게 상식인데 왜 그런 짓을 했는가 하면, 여지껏 필립스의 고급 회전식 면도기를 써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왕복식이 회전식보다 절삭력이 좋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상당히 궁금한 사항이었다. 게다가 지금 쓰고 있는 파나소닉의 왕복식 면도기도 주워온 물건인 터라 거부감이랄 게 거의 증발한 상황이었다. 덧붙여 나는 몇 가지 소독 약품도 상비해두고 있으니 제품이 나쁘지 않다면 여분을 정리하고 계속 쓸 각오도 충분히 되어 있었다. (가정에서 따라하지 마세요)


그리하여 입고된 면도기들을 열심히 분해해서 세척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건 있던 의욕도 증발시킬 만한 작업이었다. 철망에서 면도날을 뽑아 보니 털가루가 가득 끼어있었던 것이다. 고압으로 뿜은 물로도 세척하고 소독약으로 소독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까지 완전히 제거해야겠다 싶어 초음파 세척기를 사기로 작정했다. 면도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분해 불가능한 안경의 렌즈와 안경테 사이에 낀 먼지를 빼낼 방법을 찾던 차였으므로 초음파 세척기를 구입한다는 건 제법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일단 갖고 있으면 안경부터 잡다한 액세서리까지 간편히 세척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오만가지 잡다한 물건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사야 할 물건 같기도 했다.


검색해보니 초음파 세척기는 그럭저럭 괜찮아보이는 것이 토스 공동구매에서 2만 원 후반대였다. 가끔 안경이나 잡동사니를 닦자고 망설임 없이 사기에는 미약하게 비싼 가격. 아예 운동화까지 들어가는 크기라면 분명 유용하겠으나, 그것도 아니라 가격도 크기도 애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 없이도 평생을 문제 없이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결국, 나는 당연한 수순대로 당근마켓을 켜고 말았다.


당근마켓 검색에 포착된 매물은 네다섯 개쯤 되었고, 그중에서 무난하게 거래를 시도해 볼 만큼 최근에 등록된 매물은 두어 개 정도였다. 둘 중에서 마음에 든 것은 수조가 안경보다 조금 큰 정도로 당장의 내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고, 가격은 단돈 7000원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뜯어보기만 하고 사용한 적도 없다는 새 제품. 나는 잠시 고민한 뒤에 연락해서 주말에 직거래로 구입하기로 했다. 가능하다면야 곧장 운동 시간에 거래하는 게 제일이지만, 판매자가 지금 지방에 있다고 해서 별 수 없었다.


이틀 뒤 일요일. 판매자에게 다시 연락해서 6시에 거래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판매자가 매물을 숨김으로 전환했다 말았다 조작을 어려워하기에 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앱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중년 여성이 아닐까 생각하기로 했다. 사진에 나온 손도 작은 편이라 그렇게 생각함직도 했다.


거래 장소는 집에서 7킬로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좀 멀었지만 감수할 만했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가, 가는 길에 아름다운 가게를 구경하느라 시간을 써서 죽도록 달려야 했다. 보행자가 없는 자전거 전용 도로를 질주한 덕분에 늦지는 않았다. 심지어 약속장소 근처의 아파트 단지에서 출구를 못 찾아서 단지를 한참 가로지르고도 좀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매일 한 시간씩 달린 보람이 있다.


이윽고 판매자가 도착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나타난 것은 어떻게 봐도 초등학교 3학년 이하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채팅 말투나 게시물의 문체로 짐작한 것과 실제 사람의 나이, 성별이 달랐던 경우가 제법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일에 지방에 내려가 있다기에 당연히 출장이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틀렸고, 앱을 잘 다루지 못하기에 연배가 있을 거라 예상한 것도 틀렸다. 나름대로 추리나 미스터리를 즐겨 쓰는 작가라고 자부하고 있는데…… 이래서 책이 안 팔리는 모양이다.


아무튼 중고 거래를 유소년이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의 처분을 자식에게 맡기는 경우도 상당히 보편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일을 전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가정에서 누군가 한 명 이상은 나이와 무관하게 그런 일을 맡아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판매자는 내가 인사하자 쇼핑백에 담아온 물건을 내밀며 건전지가 없어서 써보진 못했다고 했다. 집에 건전지가 없는 날이 없는 나로서는 좀 이상한 핑계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집안에 항상 구비하는 물품의 기준은 집집마다 다르다. 줄자가 없어서 파는 옷의 길이를 모르겠다는 사람도 본 적이 있으니, 건전지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싶었다.

다만 상자에 대강 적힌 사양을 보니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설명에는 분명 5볼트 USB로 작동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제품엔 건전지가 들어가는 구조만 완성되어 있었고, 전원 단자가 꽂혀야 할 부분에는 목적을 상실한 구멍만이 나 있었다. 착각해서 제품을 다른 박스에 넣어온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전원부를 제외하면 모든 부분이 박스의 그림과 일치했다. 초기 설계 단계에서 잡은 예산과 생산 시점에 필요한 예산이 맞지 않아 급히 구조를 변경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저렴한 제품 중엔 이런 식으로 사양과 제품이 맞지 않는 경우가 원래 종종 있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시점에 제품에 대한 기대가 거의 사라졌다. 안 사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일단 여기까지 죽어라 달려온 게 아깝기도 했고, 물건을 팔러 나온 소년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판매 이력을 보면 거래경험도 얼마 없는 친구인데 지금 여기서 물건이 별로인 것 같아 못 사겠다고 하면 중고 물품 거래에 대한 의욕 자체가 상당히 증발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어떤 분야든 초기의 경험이 그 분야에 대한 인상을 아주 오랫동안 결정짓기도 하는 만큼, 내가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중고 거래가 할만 한 일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다.


나는 7천 원을 송금하고 물건을 가방에 챙긴 뒤에 자전거에 다리를 걸쳤다. 그러자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거래한 적이 몇 번이나 있지만, 그런 인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 역시 해본 적 없는 인사였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길고 긴 자전거 도로를 달려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초음파 세척기에 건전지를 넣고 수조에 물을 채운 뒤에 안경을 집어넣고 전원을 켰다. 들들거리는 진동과 함께 수면이 떨리는 게 보였다. 최소한 멀쩡한 물건이긴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안경은 한참을 세척한 뒤에도 별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잘 들여다 보니 렌즈와 테 사이에 낀 먼지는 눈곱만큼도 빠지지 않은 것 같았다. 안경점에서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고작 3볼트로 돌아가는 기기에 바랄 것을 바라야 하나?

초음파 세척기와.png (판매자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마음과 매물이 꼭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플랫폼의 숙제다. )



그래도 작동은 되는 기기니까 이번에는 전기면도기의 날과 망을 분해해서 집어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수염 가루가 나와서 퍼지는 듯 하긴 했다. 하지만 물 속에 손가락을 넣어봐도 물이 빠르게 진동한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 터라, 이게 무슨 효과가 있어서 세척이 되는 건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별 수 없이 다리털을 깎아서면도기를 다시 더럽힌 다음, 면도날을 하나씩 따로 넣으며 세척기의 전원을 켰을 때와 켜지 않았을 때를 비교해 봤다. 그 결과, 딱히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흐르는 물에 씻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역시 3볼트로 돌아가는 물건에 빼어난 성능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었던 셈이다.


내친 김에 나는 이 물건을 해체해 봤다. 초음파 세척기는 초음파 진 동자가 들어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게 들어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다. 잠시 후, 나사 네 개 만으로 고정된 이 물건의 하판을 분리한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 들어있던 것은 조그만 무게추가 달린 모터와 전원 회로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모터라는 물건은 미니카에 사용되어 아주 익숙하기 짝이 없는 제품이었다. 심지어 옛날에 강력하기로 유명했던 블랙모터조차아니었다. 대체 어떤 사기꾼들이 이런 물건을 초음파 세척기라고 팔고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던 나는 제품의 박스를 잘 살펴보았는데, 다시 보니 박스 어디에도 ‘초음파’라는 단어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일단 생산자는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둔 모양이다. 야비한 놈들 같으니.


초음파 세척기.jpg


요컨대 나는 7천 원에 플라스틱 수조와 모터와 스위치가 딸린 회로를 산 셈이었다. 역시 직감대로 사지 않는 게 옳은 결정이었다. 이 억울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쇼핑몰에서 샀다면 충분히 환불을 요구할 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이 물건을 중고로 산 데다, 판매자는 이것을 사용한 적이 없어 성능이 어떻다는 말을 한 적도 없으므로 따질 구석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거래 후기에 제품이 쓰레기 같다는 말을 쓸까 잠시 고민했으나…… 당사자가 작정하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아이디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낙인을 찍는 것도 너무한 짓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최소한 내가 본 거래 상대 중에서 손꼽히게 예의 바른 사람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나는 그 쓸모없는 물건을 일단 정리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놓고 부품을 유용하게 쓸 방법이 없나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모델명을 보고 영어로 검색해보니 아마존에서 판매중인 게 포착되었는데, 역시나 너무 약하다는 후기가 올라와 있었다. 미리 알았으면 사지 않았으리라. 거래 전에 박스의 모델명이 보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작아도 초음파 세척이긴 할 테니 그냥 사고 보자고 생각한 게 큰 실수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다시 팁을 정리해 드리자면, 중고 제품 판매를 할 때는 제품의 모델명도 기재하고 판매 페이지도 링크하는 편이 좋다. 원래 비싼 물건인데 이렇게 싸게 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훌륭한 상술이다. 그래야 구매자도 정보를 찾아보고 평을 읽어보며 자신이 그 물건을 사는 게 이득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결과를 빠르게 도출할 수 있다. 중고거래 앱들이 이런 부분도 잘 설명하면 좋으련만, 돈이 오가는 플랫폼인데 모바일 게임만큼의 설명도 하지 않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튼 여러분의 중고 거래에는 성공만이 있길 바란다. 끝으로 면도기들은 모두 잘 작동하며, 시험해본 결과 왕복식 전기 면도기와 회전식 전기 면도기의 면도 결과는 예상보다 차이가 적다.






*추신


2023년 8월 5일 라디오 국악방송 "은영선의 함께 걷는 길"의 코너인 '당신의 시선, 당신의 목소리'에 출연하여 낡은 물건 쓰기와 자신을 아끼는 법 등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은영선 성우님은 리브 타일러, 앤 해서웨이, 장쯔이 더빙을 전담하시며 스파이더맨의 메이 파커 더빙으로도 친숙한 분입니다. 성우 방송을 듣기만 했는데 방송에 출연하는 날도 오는군요)

https://youtu.be/ihZb5Pnsgq4?si=8b8IFVXu-ZFF7WMo



*추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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