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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운동화를 죽게 놔둘 순 없지!

by 이건해

나는 신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신고 걸을 수만 있다면 거지 발싸개 같은 것이라도 주워 신고 다닐 정도로 무감각한 수준은 아니고, 나름대로 신발에 대한 미의식은 있었다. 그런데 이 미의식이라는 게 가죽 제품만 높이 쳐주는 경향이 강해서, 운동화야 뭐 이걸 신든 저걸 신든 대동소이 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니 가죽 신발을 아주 잘 관리해서 십 년씩 신었을 것 같군.

하지만 정작 가죽 관리에는 소홀했고, 기껏해야 가죽 크림이나 일 년에 한 번 바를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서너 켤레나 되는 가죽 신발을 해질 때까지 신어서 죽여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식하고 아까운 짓이다. 마음에도 들고 발에도 잘 맞는 신발은 찾기 어렵다는 걸, 매일매일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던 나는 요 몇 년 사이에 손대는 일마다 실패해서 재정난을 겪는 것도 모자라 신발 구매에도 호된 실패를 겪으며 있는 신발을 잘 관리하는 게 최고의 미덕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에 관련된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그런데 신발을 아끼고 잘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과 미의식은 전혀 별개의 분야인 탓에, 나는 가죽 신발을 나름대로 아껴 신으면서도 운동화는 편한 신발을 신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신는 신발 정도로 여겼다. 기억하는 한 내가 아름다운 운동화를 신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어쩌면 그건 깊고 깊은 무의식에 단단히 뿌리내린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얼마전 그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운동화 따위는 기피 대상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찾아온다.


2023년 4월 어느날, 장을 보러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선 나는 아파트 단지를 걷던 와중에 폐의류 수거함 위에서 굉장히 시선을 끄는 물체를 발견했다. 비에 젖은 채 백색 바탕에 진한 청색과 빨간색으로 빛나는 그 물체……. 그것은 다름아닌 나이키 운동화였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나이키 애호가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인데, 나는 지금까지 나이키 신발을 보고도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조던 같은 농구화가 매끈하고 멋지긴 하지만, 수십만 원이나 주고 신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이키의 비싼 신발을 사는 것은 뒷동산이나 올라갈까말까 한 사람이 최고의 등산 장비를 구비하는 것과 비슷한 사치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시선을 사로잡은 나이키 운동화는 묘하게 나이키에 부정적인 인식을 품고 있던 나조차 놀랄 정도로 상쾌한 매력이 가득해서 멋스러웠고, 나아가서 몹시 탐까지 났다. 그동안 잡다한 물건을 주워다 수선해 썼고 심지어 그런 내용을 담은 책까지 낸 나로서도 신발만은 줍지 말자고 생각해왔기에 곧바로 외면할 작정이었지만…… 처음 느끼는 운동화의 마력에 사로잡힌 나는 사이즈만 한 번 보기로 하고 애처롭게 비를 맞고 있는 운동화에게 접근했다. 설포 안에 붙은 태그에 적힌 사이즈는 260. 보통 편하게 265를 신으니까 신을 수도 있을 사이즈였다. 이때 이 신발의 사이즈가 255만 되었더라도 내가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는 이 아름다운 신발의 사이즈가 260이라는 사실을 운명이라 느낀 나머지 결국 이것을 집으로 가져오고 말았다. 내가 신발을 택한 게 아니라 신발이 나를 택한 것 같다는 생각도 농담처럼 하는데, 물론 신발을 가져온 건 나의 선택이었고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영화 존 윅에서 몇 번이나 말하듯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신발을 가져온 결과로 치룬 대가는 일단 두 번의 세척이었다. 운동화라는 게 보통 그렇듯이 비를 맞아서 냄새가 만만치 않았다. 한 번 빨고도 나아지지 않는 냄새를 식초까지 써서야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오래도록 말리고 또 말렸다. 기껏 해외 직구로 산 물건을 받아서 뜯어놓고 만져보지도 못하는 듯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나는 마침내 그 신발을 신어볼 수 있었는데…… 맥빠지게도 좀 작은 편이었다. 못 신을 정도는 아니지만 발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이키는 신발의 발볼을 좁게 내기로 악명이 높았고, 나이키 에어 맥스 90이라는 이 신발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내 발에 딱 맞지 않으며 뒤축과 발꿈치 부분이 닳은 데다 앞코의 도색도 벗겨지고 있는 이 운동화를 다시 내다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어지간한 물건이라면 가능한한 손을 봐서 사용하는 나로서도 그 고민은 쉽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이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인지 추산할 수 없었다.

나는 고심 끝에 결국 버리지 않고 손보기를 택했다. 신발 하나를 이렇게 종합적으로 손보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같은 모델을 아무리 찾아봐도 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강렬한 소유욕을 느끼는가, 나는 그제야 나이키 애호가를 비롯한 신발 수집가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물건은 사람의 관념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이키 에어 맥스 90을 부활시키기 위해 새로 익히고 시험한 작업이 제법 많았다. 일단 다이소에서 제골기를 사서 최대한 크기를 늘렸다. 구두방에서나 봤던 도구를 이렇게 손쉽게 구해 써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이 중세 고문 기구 같은 도구 덕분에 신발의 사이즈는 며칠 만에 불편감을 바로 느끼지는 않을 정도로 늘어났다.


마모된 뒤축도 수선했다. 밑창을 수선하는 방법은 상당히 오랫동안 여러 방법을 시도한 전적이 있기에 금방 답을 찾아 해결했다. 다이소에서 실리콘 뚜껑***을 사와서 알맞게 자른 뒤 실리콘 고무 전용 접착제로 붙이고 칼로 골을 판 것이다. 실리콘과 고무가 워낙 본드로 붙이기 어려운 재질이라 적당한 본드를 찾아내는 일이 가장 번거로웠다. 물론 인터넷 쇼핑몰을 조금만 뒤적이면 양면 테이프로 간단히 부착할 수 있는 수선 키트가 얼마든지 있지만 추가로 돈을 들이기는 싫었다. (***주의: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실리콘은 젖은 타일등 미끄러운 노면에서 접지력이 낮다. 또 다른 재료를 찾아볼 생각이다)



갑보가 닳아버린 뒤꿈치 부분은 손쓰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이 부분도 역시 다이소에서 파는 패브릭 스티커를 사다 접착제를 동원해서 붙였는데, 지속적으로 강한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오래도록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수선이 잘 되진 않았다. 시중에 수선용 제품이 있긴 하지만 면이 일정하지 않은 천 재질에 단단히 붙이긴 어려울 듯 싶다. 떨어질 때마다 다시 붙이길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난해한 부분은 역시 도색이었다. 오랜 착용으로 흰 도색이 벗겨지고 안쪽의 붉은 가죽 색이 나와 있었던 터라 아주 진한 흰색으로 다시 덮어씌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가죽을 대체 무엇으로 칠해야 색이 벗겨지지 않고 오래 간단 말인가? 나는 잠깐 검색해보고 가죽 염색용 도료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걸 써서 색을 칠하는 게 아무 플라스틱 제품에 색칠하듯 간단히 끝날 일은 아니었다. 전처리제로 코팅을 벗겨내고 두어 차례 염색약을 입힌 뒤에 후처리제까지 발라야 했다. 번거롭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이 짓을 두고두고 할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적지 않은 돈을 들이기가 내키지 않았다. 기왕 하는 거 잘 해서 오래오래 신으면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으나, 알아보니 나이키 에어 맥스 90은 내구 연한이 정해져 있는 모델이었다. 충전재인 폴리우레탄이 수분에 의해 저절로 분해되는 가수분해를 겪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년 묵었는지 모를 신발을 주워 왔으니 다음 주쯤 흐물흐물 부서져도 놀랄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신발을 복구하는 일은 한층 더 덧없는 일로 느껴졌다. 사랑해 마지 않는 연예인이 사인을 해줬거나 첫 월급으로 샀다든가 하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깊은 추억이 깃든 신발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타협안을 찾기로 하고 이런저런 재료를 시험해 봤다. 처음으로 택한 건 ‘신발 백화제’라는 물건이었다. 오염된 스니커즈를 희게 만들수 있었다고 후기에 호평이 넘쳐나서 믿어보기로 했다. 사용해 보니 실제로 신발을 손쉽게 희게 칠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지속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게 상당한 문제였다. 손으로만 슥 문질러도 분가루가 묻어나오는 수준이라 새빨간 밑색을 덮기엔 부족했다. 원래 흰색이었던 신발을 적당히 다시 희게 만드는 데에나 유용할 물건이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을 또 뒤적였다가 가죽 가방을 크레용만으로 복구했다는 소리에 혹해서 흰 크레용을 써보기도 했으나, 눈곱만큼도 칠해지지 않아 땅을 치고 후회했다. 흰 크레용을 한 개만 살 수가 없어서 여섯 개들이 한 상자를 사야 했던 탓이다. 평생 눈곱만큼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무튼 무능한 크레용은 처박아놓고 다음으로는 아크릴 물감과 흰색 매니큐어를 차례로 시험했다. 아크릴 물감은 수용성답게 순식간에 물에 지워졌고, 매니큐어는 마르자마자 끝이 동글동글 일어나더니 저절로 툭툭 떨어졌다. 가관이었다. 매니큐어가 잘 버틸 거라 믿은 채 나름대로 중요한 자리에 가던 나는 길바닥에서 나뭇잎을 주워다 신발 코를 닦아야 했다.


잡다한 시도 끝에 그럭저럭 지속성이 괜찮은 것으로 판명된 도료는 펜 형태로 나온 유성 페인트였다. 펜 모양으로 쓸 수 있어서 사용도 간편하고 유성이라 물에 지워지지도 않았다. 이질감은 좀 있었지만 위에 백화제를 덧칠해서 그럭저럭 무마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쯤되면 애초에 왕도라 할 수 있는 가죽 염색제를 쓰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미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가죽 도색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을 여럿 알아낸 것을 수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에디슨도 자신은 실패한 게 아니라 필라멘트에 적합하지 않은 재료를 수없이 많이 알아낸 것이라 했으니, 어차피 살아있는 동안 이런 식의 시도를 계속할 거 유쾌한 자세까지 배워서 나쁠 건 없겠지.


아무튼, 그 모든 실패 끝에 나는 마침내 아름다운 나이키 에어 맥스를 신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고생을 하고 신은 신발에 줄 수 있는 실사용 점수는 의외로 높지 않았다. 5000 걸음을 넘기면 슬슬 신발이 영혼을 받으러 온 악마처럼 발을 갉아먹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5000 걸음이라면 나가서 식사하고 카페를 가는 정도의 일정까진 소화할 수 있지만, 거리에서 몇 군데 구경이라도 했다간 고통과 회한에 젖게 될 게 분명했다. 신발이 아무리 멋지든 말든 불편하면 신기를 포기해온 내 신조를 생각하면 이 신발은 포기하고 관상용으로나 쓰는 게 맞을 것이었다. 멋도 좋지만 일단 편하게 신고 돌아다닐 수 있어야 웃는 얼굴로 뽐내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신발을 포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손보기를 택했고, 라텍스 깔창과 아치 지지형 깔창, 그리고 충격 흡수 젤까지 거친 끝에, 아치 지지형 깔창 밑에 두께 2밀리의 코르크 깔창을 추가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찌저찌 답을 찾아서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매달려야 했던 걸까?


물론,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는 투입 비용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면 새 신발에 대한 옛 노랫말처럼 팔짝 뛰게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신발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좋은 말을 해주었고, 낡은 물건 쓰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자리에 갈 때 신기에도 이 이상 적절할 수가 없었다. 포기는 이미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통 신발이라면 냉정한 시각에서 볼 때 신발에 대한 평이 나에 대한 평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 신발의 경우는 내가 그 아름다움에 일조한 바가 있으니 작게나마 효능감을 느낄 만도 했다. 명화의 원작자는 아닐지라도 엉망이 된 그림을 되살려낸 복원사 같은 기쁨은 누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 이 신발을 신는 것이야말로 나의 자기 증명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근래에 들어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물건은 상당한 육체적 희생을 치루더라도 누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요컨대 신을 때마다 고통을 느끼더라도 킬힐이나 닥터 마틴 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를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라고 발이 아픈 걸 왜 모르겠는가. 그들은 그만한 고통을 지불해서라도 얻고 싶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유하고 다듬고 착용하는 일은 나를 이따금 더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그런 기분과 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





*추신

며칠 전 색을 다시 칠하고 바니쉬를 도포했다. 오래 가진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노화를 좀 막아주긴 할 것이다. 이게 너무 빨리 벗겨지면 아예 전문 제품을 살 작정이다. 언젠간 중창이 영원할 수 없는 추억처럼 산산이 부서지겠지만, 그때까진 부지런히 잘 다듬어 신고 싶다.


















*추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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