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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19. 2023

벼룩 시장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서



학교처럼 동일 집단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모이는 장소에선 벼룩 시장이 쉽게 열리는 터라 종종 구경할 수 있었는데, 학교도 회사도 인연이 없는 몸이 되니 벼룩 시장도 어지간한 우연이 겹치지 않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근래에는 그 이상의 역할을 당근, 번개장터, 세컨웨어 등의 앱이 대신해주고 있어 적적하진 않지만, 역시 물건을 직접 구경하고 만져보며 떠들썩하고 들뜬 분위기에 젖는 느낌은 오프라인 벼룩 시장만의 각별한 즐거움이다.


요 몇달 사이엔 지역 행사에 대한 뉴스레터를 보다가 그 즐거움이 문득 그리워져서 어디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이 없는지 관련 정보를 검색해봤다. 그 결과 벼룩시장 개최 일정과 장소, 판매자 모집글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가볍게 갈 만한 곳의 개최 일정만 모아 볼 방법은 찾지 못했다. 하기야 벼룩시장이라는 게 한국벼룩시장 총연맹 같은 기관의 관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지자체나 학교부터 소규모 모임, 카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이 자유롭게 여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궁리 끝에 뉴스 기사를 자동으로 검색하고 알려주는 구글 알리미 기능을 써볼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키워드를 등록하자니 애초에 벼룩시장을 부르는 명칭도 통일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치명적이었다. 핵심은 벼룩시장이더라도 프리마켓, 플리마켓, 장터, 나눔장터, 바자회 등등 성격이나 목적에 따라 부르는 법이 제각각이다. 지금 하는 대로 지자체의 알림 메시지나 모집글의 일정을 보고 메모해두는 게 최선일 모양이다. 하기야 장돌뱅이도 아니니 기회가 될 때 갈 수 있는 곳을 가는 정도로 만족해야지.


아무튼 나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이라면 무조건 가볼 의향이 있다. 이름이 어떻든 규모가 어떻든 상관없다.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의 규모에 비례해서 시장의 규모도 컸던 탓에 벼룩시장이라면 무조건 한참 돌아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은 게 보통이고, 또 그런 게 제맛이라고 생각했지만, 동네 시장에서 아주 드물게 개최해서 테이블 서너 개만 배정하는 벼룩시장도 나름대로 슬쩍 보고 지나는 재미가 있다.


올해 봄에는 그런 벼룩시장에서 아주머니가 온갖 장식품과 함께 피규어까지 파는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가, EBS의 인기 캐릭터인 ‘수학술사 세미’ 피규어가 있는 것을 보고 냉큼 사고 말았다. 한복을 입은 국산 캐릭터 피규어라 발매될 때부터 저건 전시해놔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잊어버렸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동네 시장에서 입수하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 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상상도 하지 않은 행운처럼 벼룩시장을 빛내는 것도 없다. 도파민이 예상치 못한 보상에 더 많이 분비된다는 걸 생각하면 벼룩시장이 즐겁다는 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닐까.


그로부터 몇달 뒤에는 친환경 식료품점이자 카페인 ‘지구샵 그로서리’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이때는 시장 구석이 아니라 점포에서 열린 행사니까 열 테이블 정도가 아닐까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웬걸, 가게 3분의1 가량을 활용해서 배치한 테이블은 고작 여섯 개 정도였다. 게다가 슬쩍 돌아보니 여성복이나 스키복, 운동복을 파는 판매자가 대부분이라 맥이 빠졌다. 벼룩시장에 특별히 뭘 사야겠다고 노리고 간 것은 아니긴 했지만, 장식품, 일상용품, 책처럼 재미로 살 만한 것이나 사서 한 번이라도 유용하게 쓸 법한 게 보여야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크게 낙담한 나는 대충 한번 살펴보고 다른 카페에 가서 일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괜찮은 물건이 없나 탐색하기 시작했는데…… 잘 살펴보니 뜻밖에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 하나둘씩 발견되었다. 일단 도통 팔리는 게 없다고 한탄하며 옆자리 사람과 잡담을 하던 분의 매대에선 책 몇 권과 화살표 모양 책갈피, 작은 주석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두 칸 옆 자리의 청년이 파는 물건 중에는 천 가방과 운동화, 접을 수 있는 물병이 돋보였다. 나는 이때도 발바닥 통증으로 신발을 물색하고 있었으므로 운동화부터 잘 살펴보게 되었다. 운동화는 푹신하고 품질 좋은 미즈노의 러닝화였고, 발 사이즈도 맞는 데다가 상태가 말끔한 데 비해 가격도 싸서 확실히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새파란 색상이 나의 취향과 동떨어져서 포기했다. 물주머니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스포츠 물병도 다 마시고 나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멋졌으나, 세척을 잘 할 자신이 도통 생기지 않아 포기했다. 결국 이 청년이 파는 물건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미안해서라기에는 뭣하지만, 나는 이 매대 상태가 안타까운 나머지 조언을 했다. 그는 밝고 예쁜 천 가방을 대충 맨 밑에 구겨놓고 맨 위에 새까만 가방을 놔두고 있었던 것이다. 가방 순서를 반대로 하는 게 압도적으로 나을 게 분명해서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잡다한 물건을 어떻게든 팔려고 고군분투 해본 사람의 진심이었는데 듣는 쪽에선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구경하던 중에 이 청년의 매대에 어느 손님이 찾아오자 매장 안이 떠들썩해졌다. 무슨 일인가 들어보니 청년이 매물들을 더 빨리 팔기 위해 ‘당근’에도 올렸고, 정말로 이를 보고 손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매장에 있던 모두가 이 발상의 전환에 감탄하고 말았다. 하긴 가져온 물건을 반드시 순수한 오프라인 경로로 팔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근을 거쳤다곤 하지만 구매자가 행사장까지 와서 샀으니 온라인에 홍보만 했을 뿐이다. 심지어 구매자가 와서 다른 상품도 구경하고 갔으니 모두가 이득만을 본 셈이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인식조차 못하는 고정관념을 깬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벼룩시장에 나서는 사람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홍보 전략이었다. 물건 파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을까?


그 청년 옆에 있는 숙녀의 매대도 잘 보니 흥미로운 게 제법 많았다. 상품은 조그만 문구, 팬시가 주를 이루었는데, 확실히 하나하나 당근에 올리는 것보다는 벼룩시장에서 묶어서 팔아치우는 게 나아보이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펜할리곤의 향수 샘플러도 잔뜩 있어서, 향수에도 분에 넘치는 관심을 품고 있던 나는 향수 세 개와 스티커 열 장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보니 이번에는 구미베어 젤리 모양의 플라스틱 모형이 두 통이나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액체 괴물 장난감 따위를 만들 때 쓰는 것이란다. 액체 괴물에 구미 베어를 넣으면 아기곰 가족을 습격한 공포의 거대 슬라임으로 보일 것 같은데…… 아무튼 보드게임에 과도하게 매진하면 점수칩 따위를 보기 좋은 물건으로 교체하는 데에도 골몰하기 마련이라 나는 이것들도 고르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이와 성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살 때마다 그러듯이 (가상의) 조카를 주려 한다고 둘러댈 준비를 했으나, 매너 좋은 판매자는 그따위 쓸데없는 질문일랑 일절 하지 않았다. 너무나 감사해서 향수를 더 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취향과 매너가 잘 맞는 판매자를 만나는 것도 벼룩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큰 행운이자 즐거움이다.


이날은 순식간에 돌아볼 수 있는 행사장을 두어바퀴 더 돌면서 살 만한 것들을 좀더 뒤적였고, 그 결과 자전거 안전등과 작은 주석 상자, 실리콘 티백을 더 샀다. 이중에서 실리콘 티백은 온라인 편집숍 같은 곳에서 보고 예쁘고 아이디어도 좋다 싶어 장바구니에만 넣어둔 것인데 이렇게 손에 넣게 되었다는 게 즐거웠다. 실제로 쓰기에 얼마나 유용할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이를 확인하는 건 쌀쌀한 가을의 낙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벼룩시장에 가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던 물건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을 때도 있다)



이후로는 벼룩시장 소식도 별로 듣지 못했고 소식을 접해도 갈 기회가 없었다. 미션 임파서블 표를 싸게 예매해놓고도 갈 기력이 없어서 취소할 지경이었으니 벼룩 시장에 간다고 멀리 이동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행히도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의 공원에서 상당히 규모가 큰 벼룩시장을 연다기에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갈 수 있었다.

20분쯤을 질주해서 도착한 공원에 펼쳐진 벼룩시장은 박람회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열댓개 쯤 되는 부스가 늘어서 있었고, 심지어 대부분 천막을 치고 있었다. 태양이 워낙 높이 뜬 데다 지독하게 더워서 구경하는 손님은 그늘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내가 그리워하던 수준의 축제에 가까웠다. 자전거를 묶어놓고 천천히 구경했다. 교육적 효과를 위해서인지 아동이 참여하면 추첨에서 우선권을 줬다더니 아니나다를까 호객을 하는 애들도 많았고, 팔리는 물건 중에 트레이딩 카드나 장난감, 유아용품도 많았다. 조그만 장난감 자동차 한두 개라도 버리지 않고 다음 주인을 찾는 모습이나, 그런 잡동사니를 팔아 용돈을 마련해보려는 아이들의 모습 모두 썩 보기에 좋고 즐거웠다. 아이들이 벼룩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팔아 배우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 돈 벌기가 성질나게 힘들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에게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반갑게 살 만한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었다.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이 벼룩시장의 특성상 내가 흥미를 가질 상품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 부스를 돌다 보니 젊은 부부가 책 몇 권과 온갖 잡화를 내놓은 게 보였다. 책을 넌더리나게 여기면서도 일단 눈에 보이면 뭔지 궁금해하는 이상한 성격인 터라 살펴보니 천하의 명저 “코스모스”와 심용환 작가의 현대사 만화가 있어 구미가 당겼다. 근시일 내에 읽을 자신이 전혀 없더라도 내용이 좋으면 책을 일단 사놓으려는 습성은 오랜 가난에 시달린 사람이 풍요 속에서도 식료품을 저장해두려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아무리 시일이 지나도 별로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저장강박의 한 형태 아닐까?

그런데 그 부부가 내놓은 물건 중에 책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접이식 블루투스 키보드도 대단히 탐났고, 조 말론의 바디 로션도 매혹적이었다. 로션을 사면 한정판 텀블러까지 준다는 제안도 매우 그럴듯한 마케팅으로 들렸다. 마치 내 돈을 털어가기 위해 지옥에서 찾아온 부부가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찌저찌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는데, 그 원동력은 나의 강철 같은 의지나 돈 문제가 아니라 공간 문제였다. 애정하는 책도 닥치는 대로 팔아치우고 내다버리고 있으며 키보드도 정리할까 고민중인 데다 텀블러 역시 평생 쓸 만큼 쌓여 있어 난처한 마당에 뭘 더 사서 쟁인다는 건 거주 환경 파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평생 안 쓰던 바디 로션을 굳이 싸다는 이유로 사는 것 역시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고. 하여간 자신이 뜻밖의 행운을 잡을 만큼 준비된 자인지 판별하는 능력도 벼룩시장 탐험가에게는 몹시 중요한 자질이다.


그리하여 이 넓은 장터에서 살 건 없을 모양이군, 하고 마음을 정리하며 장터를 한 바퀴 돌았는데, 그러고 나니 어느새 10여년 전 유행한 애니메이션의 피규어 하나와 반지의 제왕 주석 케이스 하나가 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불가항력적이었다. 어디서도 구하기 힘들 물건의 유혹이 이렇게 무섭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훌륭한 쇼핑을 했다고 자기합리화하며 무료 음료수 코너에 갔더니 반드시 텀블러를 가져와야 한대서 받지 못했다. 텀블러 대신 물통으로 줄곧 쓰고 있는 음료수 병을 보여줘도 직원은 안된다고 했다. 텀블러를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직원이라고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테니 깨끗이 포기했다.

그 상태로 땀을 줄줄 흘리며 젊은 부부의 부스에 다시 한 번 갔더니, 두 사람은 친절하게도 저쪽에서 무료 음료를 받으라고 알려줬다. 나는 이미 다녀왔고, 텀블러가 없으면 안 주더라고 한탄했다. 그러자 그들은 반색하면서 지금 이 텀블러를 사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내 지갑을 죽이려고 온 사람들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뭘 더 사지는 않았다. 이미 쾌락적 공간 소모를 저지른 판에 무슨 배짱으로 물건을 사느냔 말이다.


그리하여 공간 재난을 최소화해서 집에 돌아온 나는 피규어를 책장에 올려놓고 주석 상자를 잘 꽂아놓았다. 구하기 힘든 것들을 잘 찾아서 획득한 보람도 있었고, 샘솟는 소유욕을 일부 억누르고 타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지혜로운 소비였던 셈이다. 그 뒤로는 벼룩시장에 갈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으나, 가을에는 또다시 남에게 필요없지만 나에게 소중해질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고 싶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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