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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21. 2024

낙엽이 가득한 수락산과 인간 사회의 기쁨과 슬픔



북한산을 다녀온 다음, 나는 장비 관리에 시간을 퍽 많이 썼다. 일단 앞코가 벌어지기 시작한 네파의 등산화, 쉐도우프로를 수선해야 했다. 절대 스스로 손을 댈 수 없는 작업은 아닌 듯했지만, 안전과 관련된 물건인 만큼 전문가의 손을 빌리는 게 나을 것 같았으므로 나는 일단 네파를 찾아갔다. 밑창이 벌어진 정도는 무상으로 붙여줄 수도 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기 때문인데, 맡기고나서 며칠 뒤 찾으러 오래서 갔더니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황당해서 집에 돌아와 전화로 다시 문의했더니, 너무 낡아서 접착이 제대로 될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합성 가죽을 갑피로 쓴 신발은 이게 문제다. 공정상 갑피를 바닥 밑까지 당겨서 붙이고 그 위에 밑창을 접착하는데, 갑피의 코팅이 낡으면 분해되는 터라 밑창도 제대로 붙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튼튼하게 만들어 오래 신는 신발은 합성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하고 물러날 내가 아니다. 나는 사설 수리점을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황송제화에 연락을 해봤다. 싸고 작업이 훌륭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는데, 상담을 해보니 사장님도 일단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십중팔구는 금방 다시 떨어져서 창갈이를 하러 온다며, 아예 창갈이를 하는 게 낫다고 했다. 하기야 접착제가 한 부분만 빨리 노후될 이유는 별로 없으니, 앞을 붙여도 금새 뒤가 떨어질 거라고 보는 게 맞을 듯했다. 이래서 바느질까지 한 수제화가 비싼 모양이다.


그러나 밑창이 거의 닳지 않은 등산화를 버린다는 선택지 같은 건 애초에 내게 없는 터라, 여기저기 방법을 검색한 끝에 다이소에서 신발 접착제를 사다가 알아서 붙였다. 밑창과 신발 밑바닥을 갈아내고 접착제를 바르고 말리고 재가열한 다음 단단히 압착해서 며칠 말린다는, 대단히 성가신 과정이 필요하긴 했지만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몇달 뒤에 살짝 벌어진 부분을 재작업하긴 했어도 이만하면 대성공이었다. 이 녀석은 지금도 짧은 거리를 다닐 때 종종 신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새 등산화도 샀다. 잠발란 울트라라이트가 있긴 했으나 발가락이 좀 맞지 않는 것 같아 걱정 없이 신을 신발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또 몇 시간을 소모한 끝에 코오롱의 ‘트라이포드 미드’가 디자인도 현대적이고 가볍고 성능도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난하게 사막화처럼 멋진 모델은 더 비싸게 팔고 약간 과해보이는 컬러만 싸게 판다는 게 좀 아니꼬웠지만, 가죽 갑피에 가볍고 예뻐서 일상화로도 손색이 없는 데다 접지력 좋은 비브람 메가그립을 쓴 등산화니까 매력은 충분했다. 그때 운명처럼 때마침 퍽 저렴하게 나온 중고 매물을 구할 수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새 신을 신고 가기로 한 산은 수락산이었다. 북한산도 다녀와서 자신감도 생겼겠다, 안 가본 산 중에서 비교적 높으면서 교통편도 편한 산을 고른 것이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뒤로 한 시간 가까이 어둠속을 걷는게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기도 했고. 게다가 계곡이 아름답다는 산도 구경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차바위’ 또는 ‘홈통바위’라 불리는, 미끄럼틀 뺨치는 명물 암벽을 타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장암역에서 출발했다. 계곡으로 유명한 산답게 들머리로 들어가기 전부터 개천이 보였고 좌우로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스마트폰 지도만으로는 개천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 한참 가던 길을 되돌아서 개천을 건너는 헛짓을 좀 했다. 사실 이때부터 들머리를 아주 잘 확인하고 다니는 습관을 들였어야 하는데, 등산로를 자세히 알아보기를 귀찮게 여기는 성미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서 이후에도 시간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장비는 과도할 만큼 잘 챙기려 하면서도 길을 미리 알아두길 귀찮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리 알면 재미가 없다는 점도 제법 문제지만, 무엇보다 정보를 검색해서 뒤적이는 과정이 귀찮기 때문이다. 블로그 후기는 이것저것 뒤적이며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이, 유튜브 영상은 가만히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등산 내비게이션 앱인 트랭글은 좋은 앱이지만, GPS의 한계로 개천 왼쪽으로 가는 게 맞는지 오른쪽으로 가는 게 맞는지까지 추적해서 알려주지는 못한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경고를 듣고 나면 한참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유튜브를 고속으로 재생하며 필요한 부분을 캡쳐해놓거나, ‘오늘등산’이라는 앱을 이용하고 있다. 오늘등산은 다양한 등산 정보를 제공하는데, 유명 등산로의 난이도, 들머리, 주요 갈림길 따위를 알아보기가 편해서 좋다. 북한산 숨은벽 능선을 ‘매우 어려움’으로 분류했으니 초보 입장에서 신뢰도도 높다. 일찍 알았으면 훨씬 좋았을 앱이다.


장암역에서 석림사를 거쳐 가는 석림사 코스는 당연하게도 석림사 일주문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주변은 다소 을씨년스럽지만 일주문은 제법 웅장했다. 이런저런 코스를 다녀보고 느낀 것인데, 사람이 적은 길이 좋긴 하지만 들머리는 이렇게 일주문이나 화려한 입구를 지나는 편이 약간 더 즐겁다. 일단 제대로 왔다는 확신도 생기고, 여기부터 등산 모드로 전환해야겠다는 마음도 들기 때문이다. 일주문이 속세와의 경계를 의미하듯 들머리의 확연한 입구는 문명 세계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실제로는 그런 입구를 지나고도 포장도로를 한참 걷는 경우가 있지만, 기분 전환의 계기가 물리적 형태로 또렷이 존재하는 편을 나는 선호한다.


석림사를 지나서 조금 걷자 아주 은근한 경사가 진행되며 계곡길이 나왔다. 물 한 줄기가 졸졸 흐르는 개울물 같은 계곡이 아니라, 폭이 제법 넓고 바위로 덮여있어 폭포 지대처럼 일종의 조형미가 느껴지는 계곡이었다. 가을이라 수량이 줄어 심심한 감은 있었지만, 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놀아도 충분히 소화할 것처럼 보였다. 길은 그 옆으로 비교적 굴곡 없이 이어졌다. 계곡길은 크고 작은 바위와 돌이 마구 뒤덮인 너덜길이 많던데, 이곳은 물길과 걷는 길이 깔끔히 나뉘어 정비된 덕에 고생이 덜했다. 험해봤자 뒷산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실제로 뒷산 온 듯한 차림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종종 있었다. 덕분에 벌써부터 수락산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북한산의 저세상 같은 비경과 암릉을 맛보고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물론 수락산의 등산로 중에서 고르고 골라 가장 쉬운 길을 택해놓고 아쉬워할 일이 아니긴 했지만.......


(들머리에서 조금 올라가면 청량한 계곡이 보인다)


이날의 날씨는 맑았고, 기온은 5도 정도로 제법 추운 편이었다. 가을을 충분히 즐길 시간을 주지 않고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추워진 듯했다. 자연과 기온이 인간을 배려해서 천천히 추워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덕분에 낙엽이 대량으로 떨어져 풍경은 다소 황량해졌다. 저번주에는 분명 다음주면 산이 아름답게 물들겠구나 싶었는데 일주일만에 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지나버린 것이다. 즐긴 기억도 별로 없는 청춘의 빛나는 순간이 어느새 저만치 흘러가버린 것처럼. 오늘이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생각하고 사는 게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데, 등산도 오늘이 가장 재미있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게 만족스럽게 산행에 몰입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미 산 중턱에 올라왔는데 아쉬워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여담으로, 이날 나는 복장이 퍽 단순하고 저렴한 편이었다. 하의는 컬럼비아의 간절기 바지고, 상의는 컬럼비아의 베이스레이어 긴팔 티셔츠에 유니클로의 바람막이뿐이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도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복장이었다. 저번 주에 작업복 조끼도 걸쳤던 것을 생각하면 마실 가는 복장이나 다름없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불편감을 느끼지 못했다. 뭐 괜찮은 등산복이 없나 버릇처럼 장터를 뒤적일 때가 많은 요즘은 이날의 기억을 더듬어보곤 한다. 산에 갈 때 적절한 복장이 필요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최첨단 기술로 점철된 옷이 필수적이진 않은 것이다. 쾌적한 가을에 서울 근교를 다닌다면 스포츠에 적합한 옷만 입어도 딱히 걱정할 일은 없는 편이다.


옷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등산화고, 그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적절한 요령이다. 이날 나는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무엇보다 신발이 편했기 때문이다. 내 발에 아주 딱 맞는 265짜리 등산화를 신고 다니는 동안은 새끼발가락이 걱정이라 늘상 조심하고 다녀야 했는데, 270짜리 새 신을 신고 다니자니 발가락 통증 같은 건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새 신발인 트라이포드 미드는 중창이 두툼하고 딱 적당하다 싶은 정도로 푹신함과 단단함의 중간 정도라 매 걸음이 충격으로부터 안전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발에 잘 맞고 보호를 잘 해주는 등산화를 신으면 움직임에 자신이 생기고 덜 지치며 속도도 빨라진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가벼운 신발을 신고 다닐 때는 원래 항상 있는 줄 알았던 불안감이 상당히 사라지는 것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등산화를 사서 신으라고 권하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두 번 신을 신발에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신발이 부실하니 산행이 힘들어지고, 산행이 힘들어 산이 아닌 길만 가니 투자할 이유가 없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되는데, 나의 설득력이 더 강력해지길 기대하는 것보다는 등산화 브랜드에서 일상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멋진 등산화를 내놓길 기대하는 게 빠를 듯하다. 실제로도 등산에 젊은층이 유입되며 멋진 등산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런데 그런 한편으로 등산화보다는 요령이 더 중요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날 나는 수락산에서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넘어지고 말았다. 신발은 훌륭한데 내가 낙엽을 잘못 밟아서다. 보기에는 멋지지만 밟고 다니자니 낙엽처럼 성가신게 없었다. 쌓인 눈보다 흉악할 지경이다. 눈처럼 서로 단단히 응결하는 것도 아니고 얇은 종잇장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당연한 일인데, 발길이 뜸한 곳에 가서는 그걸 알고도 피할 방법이 없어서 아예 미끄럼틀을 타듯 경사를 1미터쯤 미끄러지기도 했다. 덕분에 한 벌뿐인 춘추용 등산 바지에 세로로 흠집이 나고 말았다. 디딜 곳과 디디지 말아야 하는 곳을 가리는 요령은 경험으로 배우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여담이 길었는데, 수락산 석림사 코스는 대체로 무난한 편이었다. 초중반에 상당히 가파른 암릉이 나와서 제법 신이 났다. 등산인들이 흔히 ‘호치키스’라고 부르는 발판도 처음 보았다. 말그대로 스테이플러 심처럼 ㄷ모양으로 생긴 철근을 암릉에 줄줄이 박아서 딛고 올라가기 편하게 정비한 것이다. 난간을 둘러 치기엔 애매하고 밧줄보다는 좀 더 발디딤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정비해야 할 때 쓰는 게 아닌가 싶은데, 확실히 호치키스를 밟고 올라가는 기분은 은근히 즐거웠다. 적당히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비된 길을 가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아 등산로에 야생성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치키스 길을 올라간 뒤로는 꽤 넓은 데크 전망대에서 매끈한 절벽이 곳곳에 보이는 수락산과 가까운 산(아마 불암산일 것이다), 그 너머의 도시를 조망할 수 있었다. 날이 차고 공기가 맑아 하늘부터 눈에 들어오는 전경 모두가 청량했다. 혼자 열심히 사진을 찍는 동안 40대로 보이는 등산객 일행이 와서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북한산처럼 정신나간 길이나 웅장한 비경까지는 없었지만, 확실히 너무 어렵지 않고 재미있으며 개운한 맛이 있는 코스였다. 


(전망대에서 본 수락산의 절벽. 수락산은 암릉지대로 유명하다)


그 뒤의 길도 제법 오르막이 가파르고 험했다. 능선에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커다란 바위 하나를 반신반의하며 넘어야 했는데, 다리가 짧아서 점프까지 하다 보니 뒤에서 기다리는 아주머니에게 보이기가 민망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암릉지대를 빠져나가 평탄한 숲 능선으로 들어선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주 무난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갈림길이 많은 능선에 낙엽이 하도 많아서 길을 좀 헤맸다. 이렇게 말하면 ‘대체 왜 GPS를 들고도 길을 헤매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GPS가 아무리 길을 알려준들 꺾어서 들어갈 길이 보여야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도시처럼 무슨 카페 옆에서 꺾으면 되겠군, 하고 이정표를 기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초행길에는 눈이나 낙엽 때문에 길을 놓치면 헤매기 쉬운 법이었다. 초보 운전자가 ‘10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라는 안내를 듣고도 길을 잘못 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날 나는 기차바위를 지나치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한참 다시 내려갈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구경이나 해야겠다 싶어 위쪽 능선에서 기차바위를 찾아 한참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기차바위는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로프를 끊어버린 터라 폐쇄된 상태였다. 그런 짓을 한다고 무슨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무슨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덕분에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낙엽을 밟고 넘어졌다. 젠장.


완만한 능선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계단길이었는데, 그 끝에 나타난 주봉은 비교적 소소한 편이었다. 북한산 백운대가 초대형 백화점이라면 이곳은 골목길 편의점 정도의 규모였다. 큰 바위 위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었다. 보통 하나여야 할 정상석이 왜 두 개일까? 원래 있던 것을 그 미친 자가 내다버려서 사람들이 하나를 새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후에 버려진 정상석이 발견되어 제자리에 놓였기 때문이다. 굳이 해발 637미터까지 올라와서 이따위 파괴를 하는 인간이 있다니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모든 문화재를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하니 이런 건 사회적 신뢰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 신뢰에 금이 간 것이다. 이제 어디의 무엇이든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새로 세운 정상석 덕분에 정신나간 악의 못지 않게 딱히 얻는 것도 없이 베푸는 선의도 또한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수락산의 정상에는 이렇게 사회 질서의 붕괴와 수복을 표상하는 정상석들이 신화의 증거처럼 놓여있다. 문명에서 제법 떨어진 산꼭대기에서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되다니, 참 얄궂은 기쁨이다.


(두 개의 정상석이 인간사의 다사다난함을 말해준다)


한편으로 인간 문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듯 그리 넓지도 않은 수락산 정상에도 음료와 빙과 따위를 파는 상인이 있었는데, 날이 쌀쌀하니 딱히 차가운 걸 사서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근처 바위에 쪼그려 앉아 싸늘한 김밥을 먹었다. 굳이 무거운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차나 라면을 먹는 심리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는 젊은 여성 세 명이 정상에 왔다고 신이 난 채로 식사를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고수 한 명이 초보 둘을 인도한 모양이었다. 초보 한 명이 작게 ‘야호’ 하는 소리를 내자마자 고수가 요즘은 그런 거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상당히 피곤해보이는 표정이라 제법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역시 인간 사회란 아름답지만 어려운 것이다.


저녁을 집에서 먹기로 한 터라 하산은 서둘렀다. 내려가는 길에 레깅스 위로 스포츠 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봤다. 예쁘면서도 기능적으로 보였다. 애초부터 레깅스와 세트로 팔면 입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 싶었다. 단순히 보기에 좋아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산에서 대차게 넘어져 바지를 긁어먹고 나니 레깅스 차림이면 상당히 위험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걷다 보니 남의 옷차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완전히 똑같은 길로 내려가기 뭣해서 살짝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가 또 잠깐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낙엽 때문에 당연히 있어야 할 길을 찾지 못해서 한참 엉뚱한 곳으로 낙엽을 헤치며 걷다가, 이 정도로 낙엽이 쌓여 있는 길이 사람 다니는 등산로는 아닌 것 같아 되돌아가서 길을 다시 찾기도 했다.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난의 원리를 좀 알 것 같았다.


(산속의 낙엽은 볼 때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잠시 헤맨 뒤에 모르는 길을 걸어 내려가자니 하산길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계곡으로 접어든 뒤에야 나는 간신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른 길이긴 하지만 어쨌든 계곡을 따라가면 출발 지점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만하면 다 내려왔다는 생각과 달리, 계곡길이 이상할 정도로 길고 험했다. 사람이 비교적 덜 다니는 부분이라 여기도 길 찾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걸어가면 될 법한 길이 바로 안 보일 때가 많아서 계곡을 건넜다가, 반대로 또 건너야 되나 고민하다 돌아왔다가 하는 동안 정신이 상당히 지쳤다. 멀리 서쪽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리쬐는 붉은 빛이 낙엽의 융단을 물들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등산을 마친 뒤에는 꼭 밥을 먹고 귀가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 마음대로 산속을 누비고 헤매고 걸으면서 약속까지 맞춘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퍼즐을 풀듯이 길을 찾아서 간신히 원래 지났던 길까지 도착하자, 노련한 산꾼이 인솔하는 그룹이 내려와서 마음놓고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좀 일찍 만나면 훨씬 좋았겠다. 이미 평탄한 길이니 걱정할 일이 더 있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길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과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시야에 있다는 건 정말로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간섭하지 않지만 필요할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설픈 등산 초보는 새삼 또 하나 배워서 집으로 돌아갔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전자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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