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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23. 2024

왜 등산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답하며


작년 가을부터 부지런히 등산을 하고 있다. 등산이 대단히 희귀한 취미거나 별스러운 일도 아니니 자랑할 거리도 아닌 듯하지만, 오래전의 나만 알고 있는 지인들은 그 소식을 들으면 경악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아주 오래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드게임만 취미로 했던 나는 멀리 나가는 외부 활동과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30대가 다 지나도록 회사도 거의 다닌 적 없이 은둔자처럼 집에서 번역을 하고 책을 팔며 생계를 꾸리는 시늉만 했으니, 등산같은 외부 여가 활동이 어울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대체 어쩌다 등산을 하게 되었는가?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보기로 한다.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일단 대체로 엇비슷한 성향의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나들이나 가자는 식으로 가게 된 관악산 정상에서 전에 없는 상쾌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하천 옆을 달리다 보면 운동에 동반되는 상쾌함이 찾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 정상에서 겪은 그 느낌은 자전거를 탈 때와 비교하기 힘들었다. 아마 그만큼 장시간 육체를 혹사해서 다른 방법으로 가기 힘든 장소에 도달한 끝에 보기 힘든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같은 자세로 오래 가만히 있으면 뼈와 관절이 굳어지듯,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같은 풍경만 보면 영혼이 굳어지는데, 험로를 거쳐 산 정상에 올라 보니 구겨져서 굳어진 영혼이 펴지는 듯이 시원했다. 글이나 게임 같은 정신활동으론 얻기 힘든 보상이었다. 이런 보상은 한 번 맛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다.


건강에도 관심이 높아지는 차이기도 했다. 코로나 19가 횡행할 때부터 열심히 산책을 하고 돌아다녔지만 사이즈가 늘어나고 체성분 측정치도 점점 나빠지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시간 등산을 하면 막대한 칼로리를 태울 수 있으니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산을 여러 번 타본 이후로 이건 다소 구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긴 했다. 힘들다고 양갱과 사탕 따위를 자꾸 먹으며 돌아다니는 데다가, 하산한 뒤에도 국밥과 막걸리 따위를 시원하게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심지어 등산을 했다고 건강해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길눈은 좀 밝아졌고 약간 더 잘 걷게 된 듯하지만, 검증 가능한 수치로 확인되는 부분이 없다. 다만 등산을 좀 더 편하고 빠르게 잘 하고 싶다는 생각에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며 평소에 연습을 하듯이. 써먹을 곳을 정해두고 하는 운동은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훨씬 보람차다.


덤으로 한 가지 이유를 더 찾아보자면, 작년부터 족저근막염에 시달리면서 여러 신발을 구해서 신어보고 자가수선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 이후로, 신발이 컨디션에 미치는 영향 따위를 탐구하던 습관이 등산화로 이어졌다는 것도 있겠다. 이 신발을 신고 2만 걸음을 걸으면 너무 힘들다든가, 저 신발은 접지력이 좋지만 발등을 더 조여야 발이 놀지 않는다는 식으로,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러 차량의 특징을 탐구하듯 등산화의 특징과 용도와 보강 방안 따위를 알아내고 시험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등산복도 어떤 게 가볍고 성능이 좋은지 궁리하게 된 터라 발을 빼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등산이 혼자 해도 재미있는, 아니, 오히려 혼자 하는 게 더 재미있는 취미 활동이라는 점이다. 그간 나의 취미 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보드게임은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종종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럿이 같이 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탓에 나는 20년 가까이 모임 약속을 잡으려 애썼고, 갖가지 이유로 실패하면 적잖이 상심했다. 다들 숨막히도록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혼자 탱자탱자 놀지 못해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산은 혼자 가기를 거리낄 이유가 없다. 좀 늦게 출발해도, 사진을 찍고 물을 마시고 다리를 주무르며 천천히 걸어다녀도 미안할 일이 없으니 오히려 편하다.


간섭받지 않고 간섭하지 않으며 내가 갈 길을 스스로 정해서 가거나 혹은 가다 말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하는데, 서서 두 발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한 길부터 모든 세상이 다 보이는 듯한 정상에 이르기까지 길마다 놓여있는 고통과 아름다움에 말없이 몰입하는 동안 나는 단독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삶을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갖가지 일과 나를 세상에 묶어두는 인간관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되지만, 때때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를 내버림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어도 나에게는 책을 보고 글을 쓰며 ‘나는 자유야, 나는 나인 채로 괜찮아!’ 같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 숲길을 지나고 바위를 기어오른 끝에 나오는 오지에 서는 편이 약간 나았다는 말이다. 


그밖에도 등산하는 이유를 더 찾을 수 있겠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정도인 것 같다. 사실 좀 고리타분한 면이 있는 이야기다. 인간이 하는 여러가지 여가 활동 중에서 등산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긴 시간을 소비하는 기행이라 그런지 등산의 이유를 묻고 논하는 이야기도 많아서다. 그러나 이어질 글타래는 나름대로 진부하지 않게 풀어갈 작정이다. 그동안 나는 대체로 슬픔과 한탄이 섞인 글을 자주 썼지만, 등산에 관해서는 기쁨이 반 이상이 되리라 예상한다. 거기에 등산 초보의 관점에서 소소한 정보도 틈틈이 추가하고자 하니, 독자 분들, 특히 가끔 산을 다녀보고자 하는 초보 분들은 기대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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