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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07. 2024

이브에는 불암산의 바위 위로 1



원래 크리스마스에 모여서 밥 먹고 놀거나 아예 하루이틀 놀러 가서 자고 오는 ‘엠티’ 모임이 있지만 2023년에는 불참했다. 바빴기 때문이다. 한참 일정이 늘어져버린 중편 소설도 해가 넘어가기 전에 수습하고 싶었는데 연말에 마감인 공모전에 투고할 원고도 써야 했다. 게다가 같은 모임이 말일을 끼고 여행을 갈 예정까지 잡은 터라 엠티까지 갈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덤으로 옛날과 달리 이제는 숙소를 잡고 논다 해도 밥을 먹고 마음 가는 대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임이 되었으므로 시간만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끼기 힘들어진 상태였다. 뭘 하고 있지 않으면 영혼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은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어찌저찌 트래킹 모임이 잡혀 개화산을 갔다오기도 했다. 그것도 시간이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개화산 둘레길은 가볼 만한 곳이긴 했다. 산이 별로 높지 않은데도 제법 그럴듯한 숲길을 걸을 수 있었고, 서쪽 사면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시원하게 트인 벌판과 김포공항이 보였다. 주로 도시의 풍경만 보다가 근래에 산을 즐겨 보게 된 나로서는 그토록 넓은 벌판은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광활하게 트인 풍경에 강렬한 생동감을 부여했다. 인천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또는 서울에서 호남으로 갈 때도 벌판을 볼 수 있지만, 그 풍경들과는 사뭇 달랐다. 벌판과 공항을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 본 적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산을 매일 돌 수 있다면 정말이지 멋지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은 처음이다)



조망점 이후에 잠깐 나타난 거친 암릉 위로 만들어진 데크길도, 그 옆에 멋지게 비틀어지며 자란 침엽수도 퍽 아름다웠다. 편한데도 걷고 구경하는 재미가 좋은 길이었다. 체감 온도 영하 12도에 매쉬 러닝화를 신고 온 후배 ㅎ이 혹독한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인근의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이어서 가봤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추운 날에 외부 활동을 하자고 한 게 애초에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겨울에는 여분의 양말과 방한 장비를 좀 챙기는 게 좋을 모양이다. 내 경험상 가을부터는 네 명 이상이 모이면 반드시 누구 한 명은 추위에 시달리는 듯하다. 


그래도 숲속의 사면을 올라 멋진 풍경을 바라본다는 행위를 한 덕에 2주일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쓴 보람이 있을 확률이 대단히 낮은 원고를 투고하고 중편소설은 대충 접어두었다. 머리를 억지로 쥐어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막힌 소설을 처리하기 전에 일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에 가기로 작정했다. 굳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골라서 산에 오르는 사람도 적을 것 같았고, 친구들이 안온한 실내에 모여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림같은 여유를 누리는 동안 나를 차가운 산속에 내다버린다는, 그런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행위를 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에 대한 형벌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용담처럼 떠들기 좋은 기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는 불암산으로 정했다. 강북 5산인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불암산부터 세니까 불암산을 빨리 클리어해야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심각하게 체력을 지불하지 않는 선에서 금방 갔다 와 저녁에 작업을 하기 좋은 산이다 싶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공릉백세문 코스를 알아보고 화랑대역을 거쳐 들머리로 갔다. 공릉백세문이니까 공릉역이 더 가까웠지만, 나는 환승을 한 번 덜 하는 화랑대역이 편했다. 걷는 거리는 거의 차이 나지 않기도 했고. 그나저나 역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자니 제법 추웠다. 영하 5도쯤 되었다. 산 위를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기온이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헐값에 중고로 구한 마운틴 하드웨어의 고어텍스 하드쉘을 착용하고 나섰는데, 다행히 안에 입은 히트테크와 플리스 반집업이 충분히 따뜻해서 추위에 시달리진 않았다. 


(참고로 고어텍스, 심파텍스, 하이벤트, 이벤트 같은 투습방수층이 들어가서 눈, 비, 바람을 막아주는 한편으로 안쪽에서 발생한 땀이 마르며 생긴 수증기는 조금씩 내보내주는 의류를 하드쉘이라고 부른다. 투습방수층이 없는 바람막이는 윈드쉘이라고 부른다.)


단청 무늬를 화려하게 넣어 아름다운 한편으로 약간 전주시의 호남제일문이 떠오르기도 하는 공릉백세문을 지나자 등산이 시작되었다. 역에서 한참 걸어야 간신히 시작되는 산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었는데...... 드디어 불암산이구나 감격하기에는 산길이라고 하기는 뭣한 포장인도가 아파트 바로 옆으로 계속되었다. 눈이 좀 쌓인 곳도 있어서 등산스틱을 꺼내긴 했지만, 아파트 바로 옆에서 쓰기가 좀 머쓱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명산의 입구 바로 옆에서 살면 어디서 운동할까 장소 걱정은 않고 살지 않을까? 걷는 동안 좀 ㅕ부럽다는 생각이 몰려왔으나, 물론 그건 놀러온 사람 생각이고, 실제로는 산따위는 모기 서식지에 불과하다고 싫어하는 주민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뒷산다닐 생각을 처음 해본 게 이사 오고 대략 13년은 지난 뒤였다. 원래 가까운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니 소중하게 여기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몹시 안락하게 정비된 아파트 뒤 접근로)


아파트 바로 뒤를 지나서 제법 걸은 뒤로도 말끔히 정비된 길은 한참 이어졌다. 좌우가 펜스로 막혀 군사시설 옆을 걷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는데, 멋진 침엽수들이 많이 자라 있어 크게 삭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르막은 아주 완만하지만 무시할 정도도 아니라 나는 슬슬 하드쉘을 벗어서 배낭의 조임끈에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반집업의 지퍼도 완전히 열었다. 땀나기 전에 미리 벗는 것이 안전한 산행 방법이라는 지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참고로 히트테크 같은 흡습발열 내의는 레이온이 들어가 잘 마르지 않으므로 등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본다. 레이온이 수증기를 붙잡아서 발열 효과를 얻는 것이라 속건 소재와 개념적으로 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써보면 의외로 잘 마르고 괜찮다는 실험과 후기들도 많아서 나도 시험삼아 입어봤다. 결론적으로 땀때문에 불쾌한 적은 없었다. 가성비 좋으니 사서 쓰라곤 못하겠으나, 내의로 입을 게 면티와 히트테크 뿐이라면 활용해도 좋을 듯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설마 누가 폴리에스터 속건 티셔츠 한 장 없겠냐 싶겠냐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관악산처럼 접근성 좋은 산에 가보면 오버핏 면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수두룩한 만큼, 좋은 대체품에 대한 정보도 중요할 것이다.


한편으로 마운틴 하드웨어의 하드쉘은, 모양도 빛깔도 만듦새도 좋지만 600그램이나 되는 터라 이후에는 손이 잘 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모양이 비슷하면 대동소이하겠거니, 마운틴 하드웨어 장비는 평이 좋으니 믿을 만하겠거니 생각하고 샀는데 여간 아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옷은 겉감 안쪽에 고어텍스 멤브레인을 붙이고그 안에 메쉬를 덧댄 구조로, 하드쉘 중 이런 구조를 보통 2레이어라 부르는데, 2레이어가 무겁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보다 약간 뒤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훨씬 가볍다는 3레이어 하드쉘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실제로 구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가벼운 고어텍스 제품을 찾아다닐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장비 얘기를 할 때로 미뤄두기로 하자.


슬슬 진짜 산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출발하고 거의 한 시간이 다 지난 뒤였다. 그제서야 철책이 사라지고 데크길을 넘어 흙으로 된 오솔길 능선을 타게 된 것이다. 암릉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영 시시하고 지루하게 느낄 만한 길이 길게 이어진 셈인데, 이상하게도 이곳은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눈도 좀 쌓여 있었고, 길가의 나무들도 제법 멋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래서 겨울에는 침엽수가 많은 곳을 애정하게 된다. 애국가에서 남산 위에 단풍나무가 아니라 소나무가 나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보기도 좋고 걷기도 좋은 멋진 산길)


불암산의 오솔길 능선도 난이도만 보자면 아파트 근처와 크게 다를 것은 없는 수준이 길게 이어졌다. 완만한 오르막이 지속되었고, 키가 큰 침엽수들 사이로 따뜻한 금빛의 햇살이 쏟아졌다. 숲이 조망을 크게 가리지 않아서 걷는 내내 청량감이 느껴졌다. 한쪽으로는 산이, 반대쪽으로는 도시가 잘 보였다. 심지어 유적지인 불암산성까지 지났다. 이렇게까지 동네 뒷산처럼 평온하게 걸으면서 이만한 경치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 하는 죄책감까지 들 지경이었다. 나 원 참, 대체 누가 이런 길을 놔두고 초보에게 관악산따위 흉악한 오르막을 권한단 말인가.


(바위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정상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경치 좋고 완만한 능선길의 평온함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건방떨지 말라는 듯 불암산의 페이즈2가 시작되었다. 흙이 다 가리지 못하고 흘러내린 것처럼 광대한 암릉이 물결치듯 드러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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