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대에서 거북골까지
(*업로드 순서에 착오가 있어 도봉산 얘기가 끝나기 전에 소요산 얘기를 올렸습니다. 이번 3화로 도봉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변함없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길이라고 취급하지 않을 Y계곡을 지나 신선대 앞 마당바위에 도착하니 4시 11분이었다. 하늘은 모든 면을 칠해놓은 듯 청회색으로 어두워져 빠른 일몰이 예상되었는데, 오늘의 하산로는 가본 적이 없는 ‘거북골’이라 마음이 급했다.
자운봉과 신선대 근처는 침엽수가 많아서 예전에 비해 풍경이 아주 달라지진 않았다. 나는 그 익숙한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거북골 방면으로 빠르게 내려가다가...... 지도를 보고 이게 아니다 싶어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하산하는 길은 당연히 이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선대 앞까지 돌아가보니 옆으로 빠지는 길이 남서쪽으로 하나 더 있었다. 딱히 숨겨놓은 것도 아닌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여지껏 내내 지나쳤다는 게 어이없지만, 관악산에서도 정상 옆의 샛길을 몇 번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알아챘다. 아마 거대한 목표와 장관 앞에선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나의 심리인 모양이다.
(1.은근히 채색된 신선대와 자운봉)
신선대에서 주봉 방면으로 가는 길은 아주 잘 닦인 내리막으로, 흠잡을 데 없는 데크계단과 돌을 다듬어 만든 길이 연달아 이어졌다. 온갖 색채로 물든 숲 위에 솟아오른 주봉을 바라보며 안정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분은 썩 훌륭했다. 이 정도로 안락하면서 경치까지 감탄스러운 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동안 보통의 멋진 길을 알아보지도 않고 다락 능선 따위 험악한 돌길만 다닌 게 약간 후회될 지경이었다. 이런 길을 더 자주 다니고 잘 알아뒀다면 친구들을 꼬셔볼 용기나 설득력도 더 확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꿈결처럼 아름다운 길과 주봉)
그나저나 신선대에서 조금 내려오자마자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상식이 있으면 이미 하산했을 시간인데다가 심지어 이쪽은 별로 인기 있는 길도 아닌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토록 갈구했던 고요를 마침내 만끽할 수 있었는데, 서쪽으로 접어들자마자 단풍의 색깔이 훨씬 더 짙어지기까지 해서 좀 스산한 기분마저 느꼈다. 이렇게나 오로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길을 고요 속에서 혼자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인류가 어떤 사건으로 멸망하고 몇 년 지난 뒤의 세상을 혼자 여행하는 듯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느끼는 슬픔은 익숙했지만 생경함과 두려움까지 맛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등산을 새로운 풍경 속으로 여행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새로운 감정 속으로 여행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3.아름답고 스산한 길)
내리막과 오르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는 길을 50분쯤 걸어 주봉근처를 지나고, 5시 15분쯤 오봉, 자운봉, 우이암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도봉산의 대표 봉우리 전부로 이어지는 줄기세포 같은 지점이다. 이렇게 거대한 분기점이 있나 싶은데, 의외로 그 장소 자체는 넓지 않고 바윗덩이로 이루어진 봉우리 사이에 살짝 난 실핏줄 같은 길에 가까웠다. 나는 지도를 다시 확인한 다음 거북골을 향해 바위를 딛고 봉우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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