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암에서 의상대까지
자재암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데크계단은 오래도록 평탄한 길을 걸어온 탓에 퍽 가파르게 느껴졌지만, 사실 다른 산을 생각해보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 뒤로 산길을 조금 걷자 낙엽이 뒤덮은 계곡이 나타났다. 빛과 나무에 달린 나뭇잎,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잎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섞여 그리 험하지 않은 길인데도 디딜 곳을 헷갈렸다. 나는 그러다 보이지 않는 냇물의 한 줄기에 발을 집어넣고 말았다.
(1.계단에서 내려다본 자재암)
고어텍스로 무장한 등산화라 망정이지 고어텍스가 아닌 등산화나 보통의 운동화였다면 앞으로 두어 시간은 불쾌감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물집도 잡힐 수 있는 사고였다. 고어텍스가 들어간 등산화가 표준 장비에 가까운 이유를 새삼 실감했다. 한국에서 굳이 그렇게 비싸고 갑갑한 등산화가 필요하겠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데, 서울 근교의 산은 대개 화강암 틈으로 형성된 계곡이 끼어있을 뿐더러 여름에는 비가, 겨울에는 눈이 자주 와서 예상치 못하게 발이 젖을 수 있다. 확률로 따지자면 높지 않겠지만, 안전벨트도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아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2시 14분 즈음 선녀탕에 도착했다. 선녀탕이라고 해서 전래동화에 나올 것처럼 보기 좋은 연못이나 노천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계곡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다 웅덩이를 이루며 넓게 흐르고 다시 쏟아지길 반복하는 계곡 구간이었다. 상백운대로 향하는 길이기도 해서 나는 큰 기대 없이 계곡의 데크길을 오르기 시작했으나, 계곡물의 모습은 물론이고 맞은편의 험준한 사면까지 모든 게 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앞에 보이는 모습에 감탄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하산하는 등산객 한 명이 내가 올라온 방향을 한참동안 사진 찍는 게 아닌가. 무엇이 그렇게 멋진가 싶어 뒤를 돌았다가, 나는 하마터면 탄성을 흘릴 뻔했다. 태양빛이 저녁무렵처럼 계곡의 모든 것을 금빛으로 비추어 붉게 물든 단풍도 초록 잎도 찬란하게 빛나며 살랑였고, 거친 산 사이에서 계곡물은 상쾌한 소리를 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걸을 때와 빛을 마주할 때가 전혀 달랐다. 나는 앞만 보고 다닐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름다움을 코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청년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으면서, 정작 나는 등뒤에 어떤 광경이 있는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2.빛으로 가득한 선녀탕 계곡)
데크길이 끝난 뒤로는 자잘한 돌과 나뭇잎으로 덮인 완만한 계곡길을 걷게 되었다. 이 역시 단풍이 지극히 아름다운 길로, 초록부터 진한 적갈색까지 자연색의 그라데이션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있어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만하면 머나먼 소요산까지 온 보람도 충분하고, 올해의 단풍 구경도 완전히 만족스럽게 마무리한 듯싶었다. 선녀탕과 그 부근의 풍경만으로 소요산은 가을에 와볼 가치가 충분한 산이었다.
그런데, 3시 36분쯤 선녀탕의 계곡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길이 서서히 험해지는 걸 보니 불안해졌다. 나는 지도를 다시 확인하곤 이 길을 거쳐 상백운대를 돌아 공주봉까지 정복할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을이 되었으니 3시 30분이면 하산을 시작해야 태양빛 아래 안전히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건 만용이고, 그렇게 해봐야 어둠속에서 볼 야경도 별로 없을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결국 소요산이 먼 것을 감안해서 한 시간은 일찍 왔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갈림길에서 남쪽 길을 택해 가장 짧게 도는 코스를 오르기로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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