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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색채 가득한 종주(개정)

서울의 역사와 개인적 추억을 하루에 돌아보다

by 이건해



-돈의문부터 창의문까지


바쁘게 지냈다. 소설 한 권의 번역과 검수를 거쳐 의뢰인에게 납품했고, 다음 권으로 나아갔으며, 공모전 수상작의 수정안을 썼지만 퇴짜를 맞았다. 집안에 송사가 있어 법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세탁기를 건조기 딸린 것으로 바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집안에서 네 대째의 세탁기로, 건조기를 쌓아올리니 그만큼 다용도실은 어두워졌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밝아지는 부분이 있으면 어두워지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럴듯한 상을 받았지만 오히려 마음 한구석은 위축된 내 인생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11월이 되니 슬슬 가을이 끝나가려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새빨갛던, 혹은 샛노랬던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짙은 갈색의 슬픔에 잠겨들었고, 나는 산으로 떠나고 싶으면서도 의지를 상당부분 잃고 있었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단풍이 기막혔을 텐데 이제 등산의 비수기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엽이 진 뒤부터 눈이 쌓이기 전까지가 바로 내가 생각하기로 등산을 해도 가장 볼 게 없는 시기다. 이럴 때 산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사시사철 굳건한 바위와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뿐인데, 그것들을 보자고 암릉을 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처음 가는 산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이제 당일치기로 갈 만한 산은 대부분 오른 터라 시들해진 것이다. 물론 이후에 서울에도 안 가본 코스가 얼마든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땐 그랬다. 서울 근교 등산이라는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려서 기대할 게 없다고 느끼는 상태였다. 내 인생에 기대할 게 거의 남지 않은 것처럼.


아주 긴 길을 걷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색채를 잃어가고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어느 길에서 몰입의 기쁨을 구할 수 있을까? 혼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그동안 스크랩해뒀던 등산로 자료를 뒤적이고 유튜브까지 살펴봤다. 그와중에 눈에 띈 것이 극히 최근에 올라온 등산 전문 유튜버 싼타TV의 영상이었다. 내용은 한양도성 순성길 환종주. 즉, 사대문과 사소문을 잇는 한양 도성을 따라 서울 중심부를 한바퀴 도는 코스 후기였다. 도합 18.6km에 소요 시간은 10시간 이상. 광화문에서 서울 서남권의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왕산, 낙산, 남산을 모두 연달아 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산행을 떠올려보면, 순수한 초보로 산행을 시작한 나도 근래에 사패산과 도봉산을 연달아 올랐다. 7시간 반에 걸쳐 11km를 걸은 산행 코스였다. 앞뒤로 평지를 더하면 15km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보통 이틀 이상으로 나눠 걷도록 만들어진 한양도성길을 하루에 다 돌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산을 몇 번 오르긴 하지만 그래봐야 Y계곡 같은 지옥의 암릉도 아니고 거의 모든 부분이 말끔히 정비된 길이다. 심지어 도시에서 거의 벗어나지도 않아 편의점도 화장실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니 산책을 좀 길게 하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코스를 정하고 굳게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습관과 게으름의 동물이다. 아니, 애꿎은 남들까지 끌어들일 일은 아니니 내가 습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어리석다고 정정하자.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늦게 깨어난 나는 오래도록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이유 첫째는 늦게까지 일하고 더 늦게까지 놀아버린 탓이고, 둘째는 종주가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형 인간인 나의 본성을 이기려면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풍경이나 충격적인 난코스가 필요한데, 도심속의 평이한 순성길은 솔직히 끌리지 않았다.


결국 10시 넘어서 나를 일으킨 것은, 이러다 영혼이 색채를 잃어버리겠다는 생각, 그리고 힘들면 중간에 그만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늘 뭔가를 단단히 결심하고 잘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안되면 뭐 어떤가 하는 나태하고 물렁한 마음가짐인 모양이다.


서쪽 사람이니 서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걷기로 하고 돈의문 박물관마을 앞에서 11시 15분에 위치 인증을 하고 출발했다. 내 걸음속도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늦은 출발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대충 반만 돌고 다음에 이어서 걸을 작정이었으므로 완벽히 느긋했다. 아니, 느긋하기만 한 게 아니라 만사 귀찮고 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는데...... 인왕산 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금방 날과 길을 즐기게 되었다. 평지에서 그리 높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칙칙했던 가로수가 샛노란 은행잎의 향연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새파란 하늘과 금가루 같은 은행잎, 그리고 붉게 도색된 도로는 가을의 삼원색이라도 되는 듯 강렬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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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왕산 가는 길이 금가루를 뿌린 듯했다.)


사직 근린공원으로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은 잘 정비된 산책로로, 성곽 앞은 코스모스가 피어있었으며 성 너머로는 아직 울긋불긋한 안산이 보였다. 몇 년 전 가을에 북악산을 걸으면서도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아름다운 가을날 산 위의 성곽을 따라 걷는 기분이란 정말 각별하다. 눈 쌓인 겨울의 성벽이 고적한 애수를 불러일으킨다면, 낙엽으로 덮인 길가의 성벽은 기나긴 건조물이자 안내자로서 장엄한 따스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옆을 걷고 있노라면 짝사랑에 빠진 연애물 주인공처럼 ‘이 길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늘어지게 잠이나 잤으면’ 했던 욕구를 어느샌가 상실하고 성곽길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다행히도 길은 아직 무서우리만치 길게 남았다. 선조들에게 감사하자.


성벽을 따라 걷다 12시쯤에는 계단을 올라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이게 되었다. 어쩐지 점점 사람이 많아져 인왕산 오르막에 접어들자 줄을 서서 가야 할 지경이 되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아니나다를까 고통 속에 이를 갈며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중에서 한 커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여자쪽이 이를 악물고 발밑만 보며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고, 남자쪽이 그녀를 두어번 부르며 옆을 좀 구경하라고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사이가 나쁜 것일까? 아니다. 숨을 몰아쉬면서 좁고 가파른 계단길을 겨우 오르는 와중에 풍경을 감상하려면 특수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훈련이란 바로 힘들때 멈춰서거나 계단을 반칸씩 오르는 것인데...... 당연해보이는 이 방법이 왜 특수한 훈련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애초부터 ‘이 고난을 빨리 끝내버리고 쉬고 싶다’ 같은 욕구에 가득차 있는 사람은 좀처럼 속도를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일행이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수밖에 없다. 체력 소비가 회복보다 빠르면 결국 늘어져버린다. 일이 많고 바쁘다고 장시간 쉬지않고 붙들면 번아웃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나도 노동할 때는 별로 적절하고 온당한 방식으로 쉬진 못하고 있다. 등산에 익숙해진 만큼 노동에도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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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뼈같은 성벽과 서울의 풍경)


12시 12분쯤 되자 인왕산을 오르는 남서쪽 성벽 옆 계단의 중간쯤 도달했다. 녹색과 갈색, 그리고 노란색이 뒤섞인 산 가운데를 타고 흐르는 하얀 등뼈같은 성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멀리 남산과 청회색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산과 성벽과 도시의 모습은 늘 그렇듯 경이로웠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강렬한 색채가 곳곳에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이 순례에 한층 더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역시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


12시 23분에는 정상까지 한눈에 보이는 능선에 접어들었다. 서울 중심에서 가깝고 낮은 산이지만 주변이 탁트인 가운데 하얀 성벽이 이어진 인왕산은 여느 산 못지 않게 시원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멋이 있다. 게다가 계단을 쭉 타고 올라가면 깜짝 코너처럼 나오는 암릉 구간은 짧아서 무난하면서도 밧줄이나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올리는 맛이 좋다. 도봉산 Y계곡이 매운맛 마라훠궈라면 여기는 친구가 끓인 컵라면을 한 젓가락 빼앗아 먹는 정도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안 매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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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왕산 능선은 가장 가까운 절경이다)


놀랄 정도로 북적이는 사람들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12시 38분이었다. 인파가 나이와 국적을 가리지 않아서 제법 놀랐다. 정상 표지 옆의 울퉁불퉁하게 솟은 바위에 중년의 백인 부부가 앉아 쉬는가 하면, 그 바위 위에 건장하고 쾌활한 백인 청년 남녀 둘이 올라가서 보디빌딩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놀드’라면서 웃어대며 사진을 찍는 그 모습은 유쾌하고 즐거워 보여 부러웠다. 확실히 저런 익살을 떠는 재미는 혼자선 맛볼 수 없다. 험산이나 매우 긴 길은 소수로 다니는 게 편리하지만 낮고 쉽게 갈 수 있는 산은 여럿이 즐기는 게 신이 나는 것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창의문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서 돌아나오다 동쪽의 하방에 난 샛길 같은 길로 빠져야 해서 놓치기 쉬운 길을 따라 가자니 제법 깊은 암산 길을 지나는 맛이 났는데, 이윽고 다시 성벽 옆길로 접어들자 눈앞에 또다시 장관이 펼쳐졌다. 하얀 선으로 보일 때까지 쭉 이어진 성벽 너머로 펼쳐진 북악산은 시원스러웠고, 산과 산 사이의 오밀조밀한 거리는 아직도 울긋불긋한 단풍에 물들어 화사하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면 스위스가 부럽지 않다. 물론 스위스에 가면 생각이 달라지겠으나, 접근성을 고려하면 이곳이 단연코 압도적이다. 감히 말하건대, 가까운 풍경이 좋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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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윤동주 문학관 방면 하산길의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


청운 공원 옆 포장 도로를 따라 빨간 양옥 기와 주택이 모여있는 청운 벽산 빌리지 옆을 지났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자 곧바로 북악산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대문이 바로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서울 4대문 4소문 중의 북소문이다. 그리고 원래는 이 옆을 따라 순성길이 이어지는데, 이때는 길을 보수하느라 북악산 1번 출입구를 찾아 우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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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저지대에서 사실상 북대문 역할을 창의문.)


그리하여 창의문을 지나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골목을 거쳐 도로 옆을 한참 걸었다. 걷다 보니 바로 옆으로 사이클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줄지어 오르막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었는데, 커다란 음식점 옆으로 난 북악산 출입구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길을 찾아보니 도로 밑에 인도로 이어지는 굴다리가 있었다. 도로 왼쪽으로 왔으면 금방 알았을 것을 오른쪽으로 오느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여간 길이 입체적이면 지도도 별로 믿을 게 못된다.


1번 출입문부터는 잘 정비된 산길로, 화려함의 극에 달한 가을에 황량한 겨울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풍경이었다. 남은 단풍잎은 피처럼 붉었고, 떨어진 고엽은 주황빛이 도는 연갈색으로 말라 산속의 흙에 뒤섞여갔다. 쇠락하는 생명의 처참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무가 우거져 검붉은 빛이 도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스산했다. 잠시나마 가을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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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을이 지나가는 풍경은 이따금 잔인하다)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금방 조그마한 주차장과 청운대 안내소가 나왔다. 나는 이 길부터는 와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단풍 구경을 가자고 무작정 나서서 걸은 길이 바로 이 북악산이었다. 그때는 북악산의 관리가 제법 삼엄해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통행증을 받아 목에 걸고 가야 했는데, 이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과정이 간편해진 것은 물론 좋았지만 다소 심심하고 아쉬운 감도 있었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특별한 곳에 가는 기분’이 주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기관에서 나서서 근현대역사와 함께하는 트래킹 코스 100선 스탬프 같은 거라도 만들어 놓아주면 좋으련만.



-북악산부터 동대문까지


북악산은 길이 넓고 험한 부분이 없는 산이라 성벽 옆길까지 금방이었다. 걷다가 돌아보면 뒤쪽 멀리 펼쳐진 북한산은 어두운 빛이었으나, 성곽이 이어진 북악산은 붉은색과 노란색이 아직 우세해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출발 전에는 아름다운 가을이 이미 다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절의 빛이 어느 순간에 곧바로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이 다르고, 동서남북도 다 달랐다. 이 당연한 걸 가을의 끝자락에 낮은 산을 돌면서 겨우 깨달았다. 솔직히 그동안 나는 서울 산만 돌아놓고 은연중에 낮은 산을 낮잡아보고 있었는데 낮은 산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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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운대 근처에서 보는 북한산과 북악산의 색이 다르다)


2시 40분에 청운대에 도착했다. 정상도 아니고 높이도 293m에 불과해서 주변에 나무가 많았고, 가슴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시야가 트여있지 못했다. 그러나 높지 않은 산 치고 제법 쌀쌀했던 탓에 하드쉘 지퍼를 올리고 식사를 해야 했다. 참고로 이날의 식사도 물론 편의점에서 산 닭가슴살로, 미적지근한 야생의 맛이 일품이었다. 좀더 간편히 먹을 수 있으면서 건강에도 좋은 식사를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편의점 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위안삼아 걸음을 옮겼다.


북악산에서 반드시 봐야할 것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곡장이다.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외부의 적을 공격하기 좋게 만들어진 부분이 바로 곡장인데, 몇 년 전에 잘 알지도 못하고 왔다가 거대한 단풍나무를 보고 감탄한 기억이 있기에 나는 가야 할 코스에서 잠시 빠져나가 곡장쪽 계단을 올라갔다. 천만다행으로 그 단풍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잘 살아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양 지독하리만치 새빨간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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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곡장의 단풍나무. 가히 북악산 최고의 명물이다)


나는 벅찬 심정으로 사진을 찍고 곡장의 끝부분에 있는 조망대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곡장 바깥쪽은 촬영 금지구역이라 사진을 찍지 못했더니 풍경이 시원하고 좋았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단풍나무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곡장에 자란 단풍나무는 세상의 빨간색을 모두 빨아들인듯이 선명했다. 하얀 성벽 끝에 선 탓에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요새 안의 성스러운 나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북악산의 명소로 흔히 북악 팔각정을 꼽곤 하는데, 적어도 가을에는 곡장이야말로 환상의 세계 못지 않은 절경을 갖춘 명소라고 나는 주장한다.


곡장에서 내려와 성벽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해가 벌써 기울기 시작해서 세상이 은은한 황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한쪽에 성벽, 한쪽에 우거진 침엽수림을 두고 걷는 기분은 한숨이 나도록 평화로웠다. 저 아래서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가 천천히 걸어올라와 옆을 지나쳤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기안’ 아저씨처럼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목가적 광경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나 역시 의무적으로 운동을 열심히 하는 아저씨가 되었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꼈다. 자연의 풍경에 마음 깊이 감동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좋든 싫든 운동을 해야만 고통을 예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나이를 먹으며 겪는 변화다. 시간은 주기만 하지도, 빼앗기만 하지도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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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우는 태양 아래 가을의 산과 성벽이 찬란하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3시 20분쯤 멋진 한옥 건물이 나타났다. 옆으로 돌아가 보니 누각이었다. 북대문인 숙정문에 도착한 것이다. 설명을 보니 성문 좌우로 성벽이 이어진 성문은 이곳이 유일하다는데, 북쪽 방위를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 일부러 산속에 작게 만든 숙정문만이 성벽과 함께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퍽 얄궂게 느껴졌다.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도 외면받아 무사했다고 하니, 세상에는 버려졌기에 오래가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숙정문 사진을 후다닥 찍고 옆으로 돌아서 길을 가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이곳이 도저히 사진 한두 장만 찍고 지날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근방의 풍경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성문 옆의 길을 붉게 물들이고도 나무에 남은 단풍잎이 붉게 빛났고, 오후의 사광은 600년 넘은 대문에 넘실대는 나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버리듯 산속에 지어놓은 유적 앞에서 계절은 또 한번 붉게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유적 답사에 심취하면 폐사지만 찾아다니게 된다는데, 그 적적한 몰락의 정취를 이해할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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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숙정문이 보내온 세월처럼 낙엽이 붉게 쌓인다)


숙정문에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르막이 약간 섞여있었으나 포장과 정비가 잘 된 길로, 지금만큼은 만리장성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긋불긋한 세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풍잎 깔린 길은 이 세상의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가을빛이 가득한 길의 정취에 빠져있자니 맞은편에서 백인 노신사가 나처럼 등산스틱을 짚으며 걸어왔다. 그는 나를 보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나도 그 인사를 받고 걸었다.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우리 둘 다 짙은 가을에 온몸을 담그고 헤엄치는 사람이라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지팡이까지 써서 걸어야 하는 고난에 스스로 몸을 던진 사람들의 유대감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전혀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느낌은 높은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이런 게 아마 비주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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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곽의 길목마다 가을이 가득하다)


그런데 내리막을 가자니, 이번에는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을 데려온 부부가 보였다. 등산 복장이 대단히 잘 갖춰진 부부와 달리 아들은 완전한 평상복이었는데, 씩씩대며 두번 다시 등산을 하지 않겠노라고, 난 도무지 이거에서 보람을 못 느끼겠다고 씨근대는 게 생생히 잘 들렸다. 부모는 아마 날씨도 좋고 가족끼리 나들이 겸 운동 삼아 낮은 산을 찾은 것일 텐데, 아들이 짜증만 내니 한탄스러울 게 분명했다. 산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이번에도 부모 입장에 이입되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어디 구경다니는 걸 영 개운치 않게 여길 때가 많았던 것도 잘 기억했기에 아들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즐길거리가 질소처럼 많은 시대다. 유튜브로 보면 그만인 풍경을 굳이 얘기도 안 통하는 부모와 직접 산에 올라 볼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뇌의 보상구조와 취향과 경험이 달라서 만들어지는 비극을 끊임없이 보는데, 인간의 뇌가 변하지 않으니 이런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성벽을 따라 와룡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은 성벽 바깥을 걸을 수 있었다. 데크나 야자매트가 깔린 길 옆으로 성벽을 비추는 조명이 늘어서 있어서 해가 진 뒤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정취를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자신이 오래된 성벽의 정취를 깊이 음미하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살았고, 거의 서울에서만 살았으면서 이런 풍경이 있는줄도 몰랐다는 사실에 다소 쓸쓸해졌다. 어떤 취향은 흙을 치우고 유물을 찾듯이 발견해내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만에 성벽밑으로 내려와 성벽이 보이지 않는 방향을 둘러보니,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그제서야 나는 오래도록 내 시선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성벽이 액자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진이 보이는 것을 잘라냄으로써 풍경을 작품으로 만들듯이, 성벽도 액자가 되어 풍경의 끝을 제한함으로써 내가 있는 세상과 바라보는 세상을 나누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성벽을 따라 걷는 건 거대한 통창이 달린 열차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한가로운 와룡공원 길로 올라와 걷자니 성벽은 점점 낮아져 존재감이 흐릿해지다 결국은 도로 앞에서 끊기고 말았다. 여기부턴 한동안 도심속을 탐험해야 했다. 경신고등학교 뒤의 골목길을 한참 걷는 동안은 도시에서 굳이 등산스틱 두쪽을 짚고 다니는 수상한 남자로 보일 것 같아 슬슬 마음이 위축되었다. 사라졌던 나타났다 사라지길 거듭했다. 이 주택가의 성벽은 일부가 이미 주택 담장의 일부가 된 듯싶었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유적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오래지 않아 상단부가 말끔히 보수된 성벽이 이어져 쭉 따라 걸으니 도로 때문에 사라진 성벽의 단면 옆에 성벽위로 통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이 뒤가 어디로 가는건지도 모르고 말끔히 정비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니...... 제법 크고 화려한 문루와 대문이 나타났다. 동소문인 혜화문이다. 혜화동의 그 혜화다. 내가 서대문에서 걸어서 인왕산을 넘고 혜화까지 왔다니, 나 원 참. 심지어 심하게 지치지도 않았다. 이보다 압도적인 거리를 걷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지만, 내내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동네를 두발로 이동하니 스스로 감탄스러웠다. 적절한 단련과 등산화, 등산스틱이 준비되면 나같은 실내형 인간조차 생각보다 오래 걸을 수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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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말끔하게 재건된 혜화문의 뒷면)


그나저나 이 혜화문, 한눈에 봐도 몹시 깔끔했다. 올해 초쯤에 완성하고 앞에서 테이프를 끊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찾아보니 1928년에 관리 문제로 광희문과 함께 철거되었고, 1994년에 자리를 약간 바꿔 복원되었단다. 이때 인근의 성곽도 보수했다니, 심하게 깔끔한 혜화문과 인근 성벽 위쪽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모양이다. 나는 내심 약간 더 낡은 모습을 연출해놓으면 안되나 생각했는데, 30년이 지나도 이렇게 깨끗한 것을 600년 낡은 모습으로 만들기란 만만치 않을 테니 프라모델이나 디오라마 가공하듯 생각할 일이 아닐 듯하다.


4시 35분에 혜화문을 보고 대로가 뻗은 도시를 한참 걷다가, 또 방향을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혜화문 옆으로 되돌아갔다.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이니 당연히 성벽이 뻗은 방향으로 가면 될 것을 다른 길을 찾아다녔다는게 스스로 어처구니 없었다. 반지의 제왕의 명문장 중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고, 헤메는 자라고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거침없이 걷는 자라고 모두 길을 아는 게 아니라고 해야 할 판이다. 마치 인기가 있든 없든 망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글을 써온 내 인생같군.


해질녁의 쓸쓸한 성곽길을 걷자니 낙산공원은 금방이었다. 나는 성곽의 문을 지나 공원으로 들어가며, 여기도 온 적이 있는 곳이라는 걸 떠올렸다. 8년쯤 전에 친구들 대여섯 명이라는 대인원이 드물게도 나들이를 나와서 낙산 공원을 구경하고 동대문 쪽에서 닭한마리를 먹었다. 인왕산도 북악산도 오늘 가야할 남산도 전에 가본적이 있는 곳들이니, 오늘 나는 그 모든 추억을 하루만에 되짚어 가는 셈이었다. 하루에 걸친 주마등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지금과 달리 평온하고 걱정없고 쓸쓸하지도 않았던 날들이 참으로 소중했다는 걸 깊이 깨닫고 있으니 오늘처럼 시공간 모두를 산책하며 몸과 마음 모두를 쓰는 날이 또 있을까 싶다.


5시에 낙산 공원 정상을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 사이에 해가 넘어갔다. 하늘은 붉은 색부터 깊은 남색까지 무지갯빛 그라데이션을 만들었고, 내려다보이는 도시와 흰 성벽 모두가 잠시 주황색을 머금었다.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넘쳐날 지경은 아니라 거닐기에 좋았다. 이 글을 쓰는 2025년 10월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에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으니 좋은 시기, 좋은 시간에 구경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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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낙산의 성벽 옆 거리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산책로다)


동대문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내려가니 노을이 잘 보이는 언덕을 따라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다. 이 부근이 그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로, 과연 데이트코스로 각광받을 만했다. 먼 서쪽하늘은 붉고 황혼을 맞이하여 점등된 전구들은 주황색으로 점점이 빛났는데,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속에서 카페에 앉아 시간과 풍경의 흐름을 즐기는 사람들은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이따금 발을 멈추고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곤했다. 나는 더 좋은 시절에 여기 와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었던 친구들 모두 자기 삶을 찾아 떠났는데 그 사이에 나는 무엇을 하고 이 길을 되짚고 있는가...... 하는 허망함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경치를 보고 길을 찾고 걷는 사이에 상념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듯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해가 넘어가고 성벽 앞에 늘어선 조명들이 성벽을 불그스름하게 비추었다. 어두워지는 배경 속에서 빛을 입은 성벽은 새로운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도드라졌다. 이윽고 흥인지문, 즉 동대문과 그 일대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눈앞에는 언덕 가득 수크령이 자라 살랑이고, 길고긴 성벽과 성문 주위로는 번화한 도시가 맥동한다.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한 자리에 있는 광경이다. 나 개인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사이를 걷는 일은 흐릿해진 시공간의 경계를 걷는 일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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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울이 왜 뭐든 있는 관광지로 각광받는지 알만한 지점)


예전에 친구들과 왔을 때 이 근처에서 닭한마리를 맛있게 먹었듯, 여기 어디서 식사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친 뒤에 식사한다는 루틴을 지키고 싶었고, 그다지 기운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아서 계속 걸었다. 러닝하는 사람들이 러너스 하이를 느끼듯 산행을 할 때도 오르막을 두 시간쯤 걷고 나면 체력 소진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오던데, 험하지 않은 길을 오래 걷는 것만으로도 그런 상태가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5시 50분에 동대문 DDP에 도착해서 카페를 가로지른 뒤 뒤쪽으로 나갔다. 새삼스럽지만 몇 번을 봐도 과도하게 미래적인 건물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곳이니 이렇게 미래적인 건물까지 있는 게 구색에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동대문 야구장과 풍물시장이 있을 때 와서 구경하고 커다란 LED 탁상 시계를 산 적이 있는데, 그게 안방에 놓여있는 한 나는 이 건물을 좋아하지 못할 것같다. 꽤 사사로운 원한이다.



-동대문부터 다시 돈의문까지


DDP뒤쪽은 공원처럼 되어 있어 길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았는데, 잘 보면 여기저기 순성길 표시가 있었다. 표시를 따라가니 낡은 성벽과 그 끝의 소박한 문이 하나 보였다. 광희문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이런 문이 있다는 걸 배운적이 있는지 없는지도 가물가물했는데, 정보를 찾아보니 국사 시간에 배우긴 배웠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을 지을 때 같이 만들어진 소문으로, 서소문과 함께 일반 백성의 통행, 그리고 시신 운반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희문은 여러 자료에 표기된 대로 사소문 중 남소문은 아니란다. 진짜 남소문은 남산 옆에 있었으나 실용성이 낮고 풍수지리상 좋지 않아 없애버렸다. 지금은 터조차 사라지고 표지석만 하나 남았다. 하여튼 그놈의 풍수지리가 뭘 많이도 홀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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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온갖 슬픔을 간직한 광희문)


그건 그렇고 이 광희문도 소문은 소문이라 곡절이 많다. 서소문과 함께 처형을 많이 한 곳이라 서소문과 광희문 인근 모두 천주교 성지가 있다. 그리고 광희문 앞에는 병자가 많이 모여 자연히 무당도 많아졌고, 그 결과 이 근방이 신당동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서울 한복판, 대로 중의 대로들이 죽음의 벌판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성벽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상할 정도로 필지가 큰 주택이 많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성곽은 사라졌다가 간혹 나타나기도 했다. 이곳은 성곽 멸실 구간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단지를 조성하며 멸실되었다는 팻말이 보였다. 서울이 아무리 오래된 도시라 상처 없는 곳이 없다지만 너무한 일이다.


완연한 밤이 된 탓인지, 아니면 골목을 걷게 된 탓인지 으쓸하고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사람 한 명 없는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가 다시 성곽을 걷자니 맞은편에 드문드문 멋진 카페 따위가 보였다. 잠시 후, 성벽을 따라 인도와 조명이 설치된 길에 접어들자 비로소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둠이 내린 저녁에 홀로 낯선곳을 걷는 불안감이 거의 지워진 것이다. 이제 낙엽을 밟으며 따뜻한 색으로 물든 성벽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잠시 이 길이 맞나 싶은 골목을 걷고 온 탓에 그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역시 사람은 자유를 갈구하지만 그 자유란 길 위에서의 자유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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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골목을 지나 쓸쓸한 성벽을 따라)


무아지경으로 걸으니 성벽이 또 사라지고 6시 50분쯤엔 과도한 광원과 근사한 건물이 나타났다. 불규칙하게 뭘 때리는 경쾌한 소리도 났다. 대체 뭔가 싶어 근사한 울타리 너머를 봤더니 옆이 골프 연습장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2층짜리 건물에서 신나게 골프공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그 데크길을 빠져나가니 호텔이었다. 멋지게 조성된 정원 위로 진주알 같은 전구들이 점점이 빛났다. 이렇게 멋진 시설은 좀처럼 보기 힘들테지만, 나는 호텔 부지를 빠져나가는 동안 은근한 허탈감을 느꼈다. 내 몸만을 써서 유적과 그 흔적을 따라가는 활동 와중에 편리한 현대 여가와 자본주의의 상징같은 장소를 가로지른다는 건, 반대로 비유하면 밝은색 정장과 구두를 빼입고 맨발걷기용 황토길을 지나가는 것과 유사했던 탓이다. 어쩌면 이것도 다 내가 편협하고 돈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호텔 정문에서 맞은편은 국립극장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곧장 길을 건너 성벽이 보이는 남측 순환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게된 것인데, 사실 이때 도로 초입에 더 짧은 계단길이 있었다. 워낙 어두워 이 계단길의 팻말도 보지 못했고, 당연히 대로를 따라가면 되는 줄 알았기에 기나긴 순환로를 정직하게 다 걷고 만 것이다.


이따금 버스나 러너만 조용히 지나가는 길을 혼자 등산 스틱을 짚어가며 걷는 반복작업은 지루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길은 작년 가을에 단풍구경을 한다고 친구들과 걸은 길인데, 이렇게 해가 진 뒤 인적이 드물 때 혼자 걷자니 도무지 사람이 걷도록 만들어진 길 같지 않았다. 마치 국도를 따라 걷는 기분이다. 나는 차에 치이지 않도록 카라비너형 랜턴을 꺼내서 깜빡이 모드로 켜고 가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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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울타워 옆 수백년 된 성벽)


별빛이 끌려들어온 블랙홀같은 길은 다행히도 영원하지도 않았고 벗어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정상이 있다는 게 산의 멋진 부분이다. 7시 46분에는 남산 정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찬란할 지경으로 빛나는 서울의 밤을 배경으로 외국인 단체 관광객부터 커플까지 인파가 상당했다. 물론 그 사이에서 등산스틱을 짚고 다니는 등산객 같은 건 오로지 나 한 명 뿐이었다. 늘 주변인으로 살아왔지만, 남산처럼 번화가에서 가까운 관광 명소에 혼자 등산객 혹은 순례자의 모습으로 있으니 나는 자신이 남들과 전혀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걷고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등산스틱을 내려놓고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차림새에 불과하고, 나는 어쨌거나 딱히 아무도 응원하지도 반기지도 않는 길을 계속 걸을 것이다.


올라오는 중간중간 야경을 실컷 봤으므로 걸음을 빨리 옮겨 봉수대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그때쯤 스마트폰에서는 한파 주의보가 울렸다. 좀 쌀쌀하다 싶었는데 몸이 식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칼바람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날선 바람이 몰아쳐댔고, 멋을 내느라 가벼운 옷만 입은 사람들이 그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나는 재킷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넥게이터를 끌어올려 코와 귀, 뒤통수까지 모두 가렸다. 습관적으로 추위 대비를 하고 다닌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남산의 내리막길로 가려던 차에...... 케이블카 승강장 인근 상가에서 파는 어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유혹이었다. 출발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이라곤 청운대에서 먹은 닭가슴살 하나뿐인 것치고 대단히 양호한 상태였으나, 느닷없이 칼바람이 몰아쳐대니 허기가 스며오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의 온기가 간절했다. 일정을 마친 뒤에야 근사한 식사를 한다는 결심이 어묵 하나로 훼손되는 건 아니겠지. 덜 먹고 오래 걷는다고 누가 큰 상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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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소한 음식도 때로는 생명의 맛이 된다)


그리하여 만만치 않은 값을 치루고 오뎅 한 꼬치를 사서 천천히 음미했다. 어묵은 둘째치고 따뜻한 국물이 그야말로 영혼에 스며드는 맛이었다. 따뜻하고 감칠맛이 나면서 짭짤한 이 맛이 바로 생명의 맛이라고 주장할 만했다. 실제로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 번개가 치며 합성된 유기물이라는 설도 있으니 제법 근거가 있는 감탄이었던 셈이다. 나의 과거를 회상하고 600년 전의 도성을 돌다 못해 지구 생명의 발생까지 거슬러오르다니, 칼 세이건도 박수를 칠 만한 하루다.


그나저나 한양도성 순성길에 있는 산을 모두 돌았으니 이제 산을 더 오를 일은 없다. 등산할 때도 지루한 하산길에는 팟캐스트를 듣는지라 배터리를 확인했는데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보조배터리도 다 써버린데다, 스마트폰이 노후되어 30퍼센트 쯤 되면 순식간에 쭉쭉 떨어지는 상황이라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덤으로 갤럭시 워치마저 꺼지기 직전이었다. 에너지가 떨어져가는 건 내 육체만이 아니었다. 몹시 초조해졌다. 스마트폰이 꺼지면 일단 인증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경로 기록이 중단되는 건 물론이고 성곽이 남아있지 않은 길을 도심 속에서 찾느라 진땀을 뺄 것이다. 나는 전기를 아낄 수 있도록 지도를 이미지로 캡쳐한 뒤에 기기를 모두 초절전 모드로 바꾸었다. 정 절박해지면 편의점에서 비상용 배터리를 사는 수밖에 없다. 물과 식량뿐만 아니라 배터리도 여유롭게 챙겨야 한다는 걸 잊은 대가다.


남산에 특별히 험한 길이 없긴 하지만 유적 전시관 방면으로 하산하는 길은 한층 더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도시의 풍경조차 더 맑고 아름다웠다. 바람이 많이 불어대는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낮에 갔던 인왕산에서 도성을 비치는 조명이 별무리처럼 빛나는 것까지 확인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머나먼 별에서 와서 고향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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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저 멀리 내가 온 곳의 성벽이 빛나고 있었다)


숭례문까지는 가까운 편이라 어묵을 먹고 40분쯤 지난 8시 30분경에는 마지막 인증을 마칠 수 있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화재 이후 복원된 유적을 다시 감상하는 기쁨보다는 스마트폰이나 육체가 탈진하기 전에 인증을 마쳤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남은 것은 남대문부터 서대문까지 얼마 안 되는 도성길을 따라 걷는 것뿐이다. 가장 혹독하며 여러가지 문제를 추가로 초래할 수 있는 배터리 부족의 고난을 일단 넘겼으니 더 큰 걱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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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지막 인증이 된 숭례문 앞)


이제 북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되는데, 스마트폰을 최대한 안 보려고 하다 엉뚱하게도 남하하고 말았다. 고풍스러운 서울역 구역사가 조명으로 빛나는 모습이 보이기에 찍고 돌아섰다. 그러고보니 서울역 구역사는 수학여행 갈 때 한 번 이용해봤다. 서울에 오래 살았다고 유명한 곳에는 꼭 하나씩 추억이 남아있다는게 새삼 놀랍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덕수궁까지 가는 길은 완전히 도심중의 도심으로, 이 시간에는 유령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 GPS로 내 위치를 확인하는 대신 도로 표지판을 보고 순수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길을 찾아 걸었다. 좀비 창궐로 몰락한 문명의 흔적을 더듬는 기분이었는데, 그 와중에 24시간 순대국밥집을 발견해서 반색하며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일정이 끝난 건 아니지만 큰 고비를 다 넘긴데다, 이후로는 순대국밥집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서둘러 기회를 잡기로 한 것인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직원은 장사가 끝났다고 난색을 표했다. 24시간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와서 쫓겨나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장사 시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건 대단히 익숙한 일이다. 나는 분노도 원한도 버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분노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딱히 그렇지 않으니 움직이는 게 가장 나았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윽고 덕수궁에서 저주받은 돌담길을 따라 정릉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올랐다. 이 길도 친구들과 몇 번을 걸었다. 덕수궁 구경을 한 뒤에도 이 길을 갔고, 궁궐을 다니며 문제를 푸는 야외 방탈출 게임을 한 뒤에도 이곳의 카페에 갔다. 방문한 횟수로 치면 오늘 간 곳 중에 가장 친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원래 건물 대부분이 빨간 벽돌로 이루어져 따뜻하고 정겨운 동시에 이국적인 느낌을 주던 거리는 지금은 한밤의 어둠과 고요에 감싸여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아마 해가 지기 전에, 혹은 해가 진 직후에만 왔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너무 늦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잠시 적적한 기분으로 깜빡이는 랜턴 불빛을 보며 멸망한 도시의 탐험가처럼 걸었다.


그리고 9시 21분, 골목을 빠져나오자 출발점인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가슴이 트이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라기보다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이제 불안할 이유따위는 없었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완전히 지쳐버리거나 무릎이 고장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끝이었다. 더 헤맬 길도 남지 않았고 더한 추위를 견딜 방법을 강구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강요하지도 응원하지도 않는 이 도전을 어떻게 해낼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이 10시간에 걸친 18.6km의 환종주는 완료되었다. 철저한 실내형 인간인 내가 성치 않은 무릎으로 하루만에 종주를 마쳤는데 좀 늦으면 어떻단 말인가?


이제 남은 것은 밥을 먹고 돌아가는 일뿐이다. 그런데...... 역까지 가는 동안 적당한 국밥집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찾을 기력도 없었다. 그보다는 지하철에 타는 게 체력 보존에 유리할 것 같아 냅다 귀로에 오르고 말았다. 10시간 동안 닭가슴살과 양갱, 포도당 캔디, 어묵 말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귀가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이것도 다 연속 기록을 중단하지 않고 일정을 마치려는 하찮은 오기로 자초한 일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장 쓰러질 정도는 아니기도 했다. 한 끼라도 못 먹으면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어디선가 에너지를 끌어쓰며 심한 고통 없이 버티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선 생존형 인간인 셈이다.


이윽고 집 가까운 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도중에 진짜 24시간 음식점이 보이기에 빨려들듯 들어가 앉았다. 공교롭게도 거기서 파는 메뉴라곤 죄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그중에서 그나마 나은 매생이 굴국밥과 막걸리를 시킬 수 있었다. 먹는 동안 꺼져버린 스마트폰도 충전을 부탁했으므로, 나는 완전한 미식가처럼 식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본의 아니게 하루종일 걸으며 팟캐스트도 음악도 한 번을 듣지 않았다. 순도 100퍼센트로 몰입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이런 절대적 몰입의 시간과 육체의 혹사가 내게 무엇을 주었을까? 그런 의문에 답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옆자리에선 소개팅한 남자가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가지 않아 고생했다는 얘기, 어머니 실손 보험료가 얼마가 나왔다는 얘기 따위를 했는데, 그런 ‘또렷한 관계 추구’나 ‘삶의 재정적 영위’가 훨씬 ‘남는 게’ 많을 것이다. 어쩌면 집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게 창작에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양 도성을 한 바퀴 돌아봐야 실질적으로 남는 건 피로와 사진과 완주 인증서 정도일 테니까. 내가 하루만에 한양도성길을 다 돌았다는 자랑거리도 되긴 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대단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딱히 형체를 가진 무엇이 되진 않더라도, ‘철저히 쓸모 없는 일’에는 반대로 그 철저함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멀어져 전혀 다른 세상에 빠져드는 일은, 일시적 탈출에 불과하다 해도 내가 어딘가에 매여있지만은 않은 존재라는 걸 알게 해준다. 여행의 역할과 마찬가지다. 거기에 덤으로 내 육체의 힘만으로 높은 곳에 오르고 먼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마음속에서 삶의 지평이 넓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도 있을 거라는 확신은, 다른 방면으로 별반 쓸모가 없을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 내 미래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서울의 명산들을 모두 다니고 한양도성 둘레길을 하루만에 도는 활동에 무슨 의미나 보람이나 생산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미리 적어두는 답이 바로 이런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될 이 활동들에 잔을 바치며, 이제 또다른 목적지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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