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자들의 반응이 편치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새로운 집착을 갖게 될까봐.”
연락을 받은 정원은 양 팀장을 안전 카페로 불러냈다. 마치 원래부터 일주일에 한 번쯤은 그렇게 만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양 팀장은 편치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근래에 겪은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원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은 뒤에 간결히 정리했다. 정리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쩐지 지극히 단순한 일을 아주 어리석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알지만 이 불안함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러자 정원은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하곤 말했다.
“팀장 님의 예전 심리 상태와 행동을 떠올려 보면 우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고려를 하는 게 합리적이죠. 다만 타인에게 털어 놓고 싶을 정도로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는 건 예상밖이군요. 아시다시피 인공 두뇌로 그 정도로 강한 감정, 즉, 행동을 유발할 정도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기란 어려운 편입니다.”
확실히 기복이 미미한 다른 감정과 비교해 보면 관계에 대한 불안은 과하게 정도가 심했다.
“인공 두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내 원래 두뇌에 문제가 더 생긴 걸까요?”
양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동요를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뇌가 이상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인간관계가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압도적으로 두려웠던 셈이다.
정원은 다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가지고 있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굳이 증상만으로 추측할 것 없이 장비로 확인을 하죠.”
그러면서 그가 꺼낸 것은 총 모양의 체온 측정기 비슷한 장치였다.
“인공 두뇌와 통신해서 두뇌 상태를 점검하는 장치입니다. 근거리 무선 통신이니 통증은 없습니다. 이마를 이쪽으로 대시죠.”
양 팀장은 시키는 대로 총구에 이마를 댔다. 옆 테이블에서 힐끔거리는 게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원도 마찬가지로 자기 일을 했을 따름이다.
“다행히도 상태는 좋습니다.”
정원은 총을 금방 치우며 말했다.
“다만 인공 두뇌가 천연 두뇌와 지속적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편도체의 일부가 미세하게 기능을 되찾은 듯합니다. 아주 드문 케이스인데, 시간이 지나면 더 회복되길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회복이란 보통 환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뇌처럼 재생이 어려운 부위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양 팀장은 사고 이후로 최악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혹시 살아난 두뇌 기능을 다시 죽일 수 없을까요?”
양 팀장의 질문에 정원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두뇌의 어떤 부분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완전히 밝혀진 게 아닐 뿐더러 그걸 알아낸다고 해도 두뇌의 다른 부분에 영향을 주지 않고 안전하게 파괴하거나 마비시키는 기술은 없습니다. 부작용을 감수한다면 가능하겠으나 지금 팀장님의 상태를 보면 그만한 이득이 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양 팀장은 정원의 말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삶이 다시 엉망이 될 위기와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이성적 사고를 압도했다. 양 팀장은 그 감정적 동요를 인지하자 잊고 있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포는 그림자만 있고 실체가 상실된 것이라 그는 즉석에서 연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서워요.”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내가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도 무섭고, 내가 다시 부정적인 감정들에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것도 무섭습니다. 불합리한 생각이라는 건 잘 알지만, 더 확실하게 감정을 통제하게 만들어주셨다면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러자 정원의 얼굴에도 전에 없이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양 팀장은 그것을 자신이 느끼는 것과 유사한 불안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두뇌의 상태가 비슷하므로 아마 맞을 것이었다. 정원에게도 부정적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양 팀장에게 새로운 정보였다.
정원은 천천히, 복잡한 연산을 거친 인공지능처럼 말했다.
“심리학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이론밖에 모르지만, 팀장 님의 증세는 대인기피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인간 관계로 인해 피해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으므로 원인이 될 관계 자체를 꺼리는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이 감정의 작동 자체를 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불안은 생존과 연관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작용이기 때문이죠.”
병원에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싫은 패턴이었다.
“자연스러운 작용이니까 평생 시달릴 운명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요?”
그러자 정원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불안이 그 정도라면 예선 씨와 상담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예선 씨는 오랜 기간에 걸쳐 타인의 호감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양 팀장은 뜻밖의 말에 잠시 사고가 멈춰버렸다.
“예선 씨가……나와 대화하길 바랄까요?”
정원은 조용히 답했다.
“예선 씨는 이제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당신도, 예전의 당신도.”
일상으로 복귀한 예선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 자신에게 존재하긴 했나 싶을 정도로 과도하게 안락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 작자도 불필요한 감정이나 경계를 유발하는 작자도 없다니, 회사 생활이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이건 마치 퇴사한 뒤 누구 하나 간섭하지 못하는 땅으로 이사해서 혼자 텃밭을 일구는 사람의 브이로그 같은 일상이었다. 예선은 양 팀장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사방에서 옥죄고 비틀어 바닥까지 몰아갔는지 새삼 실감했다.
수술 이후로 양 팀장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예선에게는 그랬다. 어쩌다 눈을 마주쳐도 그 순간보다 더 길게 보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대화로 이어지는 일도 없었고, 업무상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책상에서 물건이 떨어져 예선에게 가까운 쪽으로 와도 주워달라 하지 않고 직접 움직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피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라, 서로 관심 가질 이유라곤 전혀 없고 각자 할 일 하기 지독히 바쁜 타부서 사람들끼리 접하는 느낌이었다. 예선은 그 무관심과 최소한의 교류가 생전 처음 접한 자유의 세계처럼 좋았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양 팀장의 상태에 대한 정원의 해설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도 했다. 강렬한 감정은 거의 다 상실한 상태라니. 게다가 앞으로도 회복될 수 없다는데 과연 양 팀장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원은 양 팀장의 것보다 낡은 인공 두뇌를 갖고도 잘만 살고 있지만 그건 정원의 행실이 바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양 팀장처럼 뒤틀린 인간은 감정의 사멸로 인해 인간미라곤 한톨도 없는, 로봇같은 자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양 팀장이 뿌린대로 거둔 업보이리라는 생각도 들긴 했으나, 예선은 양 팀장이 다시는 삶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벌이라면 두뇌 기능의 부분 상실로 해결된 게 아닐까. 그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충동질하거나 방조한 것이 나태한 두뇌였다면, 두뇌 파괴보다 더 나은 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선은 타인의 삶과 관계가 깡그리 붕괴하는 모습을 웃으며 감상할 정도로 가혹하고 야멸차지 못했다. 증오와 분노와 복수심으로 들끓을 때는 그럴 줄 알았는데, 안정을 찾고 보니 아니었다.
그런 예선에게 정원이 전달한 소식은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미약하지만 상실되었던 두뇌 기능이 회복되어 교류하는 여성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니. 인공 두뇌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인 정원이 하는 말이니 믿어야 했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직접 만나서 불안에 대해 얘기해보라는 정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뒤, 예선은 잠시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떤 식으로든 위해가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동안 쌓인 기억이 이성적 판단 이전에 반응을 이끌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는 두렵지 않을 거라는 정원의 말대로, 예선은 카페에 들어가 양 팀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술 이후로 사무적인 일 이외에 어떤 관련도 없는 듯 행동하던 양 팀장은 예선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윗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예선은 의전을 받는 게 이런 것일까 싶었다.
자리에 앉은 예선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을 보고 불안감을 느끼신다고요.”
양 팀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을 느낀 뒤에 보이는 반응처럼 보였다.
“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걱정스러워요. 해를 끼치는 건 아닐지, 혹은 반대로 너무 좋은 영향을 끼쳐서 필요 이상의 호감을 사는 건 아닐지…….”
예선은 순간 양 팀장의 말에 공감했고, 그 사실에 놀랐다. 자기의 언행이 남자의 접근을 유발하거나 구설수에 오르는 근거가 되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에 몇 번 크게 시달린 이후로 마음 한구석에서 늘 품고 있는 불안을, 돌고 돌아서 양 팀장과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얄궂었다.
“해를 끼칠까 걱정하는 건 그렇다쳐도, 많은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좋은 일 아니에요?”
유전자 전달을 꾀하는 본능에 따르면 이익일 테니까. 예선은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양 팀장은 겸연쩍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타인을 안식처로 삼는 걸 넘어서…… 집착하게 될까봐 그래요.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또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호감까지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합리적인 사고라는 명분을 덧붙여서.”
정원은 양 팀장이 그런 짓을 벌이는 건 불가능할 거라 예상했지만, 양 팀장의 걱정은 분명 강력한 근거가 있었다. 그건 예선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다. 그녀는 양 팀장의 기이한 욕망과 폭력을 떠올리고 잠시 암담해졌지만, 그게 더는 자신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의식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문제를 더 일으키진 않겠죠. 중요한 건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인데…….”
예선은 잠시 자신이 불안을 다루었던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일단 물러서세요. 나의 언행과 태도가 불안을 야기하지 않는 곳까지 물러서고, 그런 다음 천천히 다가가세요. 그러다 다시 물러나고 나아가기를 반복하세요. 어쩌면 그렇게 찾아간 자리가 너무 물러선 곳일지도 몰라요. 교류도 발전도 없는 외딴 곳일 수도 있죠. 하지만 거기 있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모두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니까.”
“그건…… 마치 일종의 무인도로 피하는 것 같군요.”
“하지만 진짜 무인도는 아니죠. 살면서 상호작용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엔 누군가가 찾아올 거예요. 아니면 스스로 지쳐서 나가게 되겠죠. 그런 식으로 물결을 타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불안과 두려움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받아들여요. 극복하는 방법 같은 건 저도 모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타인도 지옥이고 고독한 자신도 지옥이라면 그 사이에 잠깐씩 나타나는 안정의 땅을 찾아서 뛰어다니면서 화상을 입은 발을 식히는 거죠.”
예선은 다시 멍해진 듯한 양 팀장의 얼굴을, 그의 이마를 보고 덧붙였다.
“이제 감정에 덜 휘둘리게 되었으니 팀장 님은 저보다 빠르게, 합리적인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점에선…… 부러운 부분도 있네요.”
양 팀장은 예선의 말을 곱씹듯 가만히 앉아서 손끝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예선 씨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금까지 잘도 견뎌왔군요.”
예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감탄인지 격려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에 이유 없이 뭔가가 치미는 듯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억누르고 답했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어딘가가 마비되길 바라면서.”
그에게 해줘야 할 말은 다 한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 팀장도 급히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사과를 못 했는데……”
“괜찮아요.”
예선은 곧바로 말을 가로막았다.
“정말로 괜찮아졌으니까, 굳이 사과까지 필요하진 않아요.”
양 팀장에게 부채감을 남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용서를 하기 싫었던 것도 아니다. 예선은 양 팀장의 두뇌와 그로 인한 언행이라는 일종의 재난이 이제 완전히 죽어버렸고, 그에게 보편적 고뇌라는 형벌만 남은 것을 직접 확인하니 정말로 지난 일에서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예선은 멍하니 선 양 팀장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섰다. 문 옆에는 정원이 서 있었다. 양 팀장이 일으킬 수 있을 문제를 걱정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예선이 느낄 수 있었을 두려움을 걱정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쪽이든 그녀는 감사했다. 안전지대가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선은 그가 이 자리에 없었어도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아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얘기를 잘 끝내신 것 같군요.”
정원이 걸으며 조용히 묻자, 예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보다 더 괜찮아졌어요.”
그녀는 몇 걸음 걷고 덧붙였다.
“양 팀장님도 괜찮아지겠죠. 그런게 보통의 삶이기도 하고.”
“다행입니다.”
담담히 답하는 정원의 옆모습에선 별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은 의도나 의미도 없었고, 무신경한 피상성도 진심어린 공감도 없었다.
예선은 두려울 일도 지칠 일도 없는 관계에 감사하고, 정원이 자신을 돕기로 하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예선이 심리적 궁지에서 벗어났으니 그도 후회를 얼마간 지우고 자신의 의미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선은 정말 그런지 굳이 묻지 않았다. 말로 꺼내어 확인하는 순간, 이 선의의 협력이 일종의 거래처럼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둘의 갈 길이 나뉘는 길목에서, 예선은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 뵈어요.”
“네.”
정원은 늘 그렇듯 담담히 답하고 걸어갔다.
가볍지도 처지지도 않은 그의 건조한 걸음걸이를 보며, 예선은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언젠가 그 걸음걸이가 흐트러질 때에 가자고 할 수 있도록, 감정이 희박하더라도 즐길 수 있을 만큼 맛있는 디저트를 파는 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