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음날 집에서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깨어난 양 팀장은 모든 것이 변했음을 알았다. 일단 꿈에 예선이 나오지 않았다. 명확한 형태나 이야기로 기억할 수도 없는 꿈속에서 예선이나 그녀를 둘러싼 욕망과 슬픔과 분노가 뒤엉키는 나날이 오래도록 이어져 숙면을 방해했는데, 그런 고난 없이 죽은 듯 자고 일어나니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다.
양 팀장은 문득 떠오른 그 생각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예선은 이제 감정의 테두리에서 사라졌다. 그동안은 감정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도 예선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자유였다.
기억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양 팀장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 대부분 되짚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화가 나진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합리하고 어리석고 충동적인 짓을 예선에게 너무 많이 저질렀다. 맥락은 알지만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므로 분노는 자신의 몫이 아닌 듯했다.
다만 의문은, 의식을 잃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자신이 별 상처 없이 집에 돌아왔느냐는 것이었다.
양 팀장은 혹시 무슨 단서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침대 옆의 콘솔 테이블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힌 글씨는 예선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추락 사고로 두뇌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영구적 장애가 우려되어 나노봇을 이용한 치료 및 인공두뇌 이식을 진행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 소지품 중에 있던 카드 키를 이용해서 자택으로 이동했습니다. 사건 조사등 복잡한 문제가 얽히길 꺼리실 듯하고 상태가 매우 긍정적이라 이동을 결정한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아마 바로 내일부터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테고, 일주일 후부터는 감정적, 정서적 불편감이나 위화감도 사라질 것입니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당신이라면 더 빠른 시일 내에 그 상태를 쾌적하게 여기리라 봅니다. 물론 낮은 확률로 인공 두뇌를 제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경우엔 충분히 안정된 3개월 뒤부터 강제 적출이 가능하나, 인공두뇌를 이식한 뒤에 적출한 실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적출 후의 생활이 어떤 양상으로 변할지는 알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하기 바랍니다.
덧붙여 구세대 기종이긴 하나 인공두뇌를 먼저 써본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두뇌 기능 일부를 인공두뇌에 맡기는 느낌은 처음에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듯 내 생각과 감정이 내 것이 아닌 듯한 위화감이 계속됩니다. 다리뼈나 관절의 각도가 크게 조정되어 더는 뛰지 못하고, 그나마 걷는 것도 전과 다른 방식이 강제된 기분도 듭니다. 인공두뇌는 사용자의 안정을 위한 억제를 최우선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정적 자유를 다소 상실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대로 그 역시 오래지 않아 익숙해집니다. 수동 변속 차량을 몰다가 자동 변속 차량으로 바꾼 정도의 사소한 변화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괜찮아진 겁니다.
사실 마음을 기계장치에 맡기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스스로 개발하고 체험중인 지금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의 마음은 부정확하고 장내 미생물부터 지속적 외부 환경의 자극, 약물, 혈당치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이라 애초에 완전히 통제한다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제어되지 않는 지경에 처했을 때 보조해주는 장치를 쓰는 것도 인간 문명 발달의 자연스러운 방향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금은 동의할 수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동의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천연 감정을 잃어버린 것에 비해 얻는 이익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실감할 테고, ‘감정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형용모순처럼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인공두뇌에 관련하여 궁금한 게 있다면 기탄없이 문의해 주십시오. 이제 당신이 어떤 문제로든 나를 증오하지 않으니 언제든 환영합니다.
박정원 드림
양 팀장은 편지를 다 읽고도 당황이나 분노 혹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죽였다고 생각한 정원이 살아서 자길 구했다는 사실도 예상을 초월했고, 그의 손에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꼴로 두뇌가 개조당했다는 사실도 오싹해야 했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기껏해야 허탈한 감정의 잔향 같은 것만 맴돌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남들을 폭행하다 건물 붕괴로 추락했으니 그대로 죽었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 손에 살아났으니 불평할 순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나저나 예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 팀장은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주먹으로 쳤던 사실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 직후에 바닥이 무너졌으니 예선도 같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편지에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별 이상은 없으리라 생각하는 게 좋을 듯했다. 떨어지기 직전에 정원이 깨어나 붙잡은 것일까. 마치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처럼.
양 팀장은 그런 유치한 생각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주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별 변화는 없었다. 쓰레기같이 불합리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다는 미약한 죄책감과, 두 사람이 무사하길 바라는 걱정 약간이 전부였다. 예전 같았다면 아마 길길이 날뛰고 방안을 온통 뒤엎었으리라. 심하면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다 눈이 맞아 통증을 모두 잊을 정도로 과격하고 격정적인 정사를 나눴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텐데 지금은 이토록 평온하다니 기적같은 일이었다. 양 팀장은 금방 만족할 거라는 정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양 팀장은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회사 생활을 영위했다. 당연히 예선도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녀는 뺨에 커다란 밴드를 붙이고 있었을 뿐 달라진 게 없었다. 절뚝거리거나 어디 보호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양 팀장을 꺼리거나 이상하게 보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인사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양 팀장은 원점 회귀라고 할 만한 그 변화가 무척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반갑고 기쁘다고 할 만했다. 요 근래에 발생한,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로 이어지는 듯했던 관계의 균열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양 팀장은 그 균열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가 만들었음을 생각하면 가슴속 어딘가가 뭉개진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릿속의 회로가 꼬인 기분이었다. 마치 필름이 끊긴 사이에 자신이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른 영상을 확인한 듯이 난처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화가 치밀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양 팀장은 그 사실부터 빠르게, 마치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자신의 현실로 인정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양 팀장은 폐허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일을 깔끔히 처리하지 못해서 불리한 지경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반격하리라 각오했었다. 사내 권력을 이용한 불이익이든, 심부름 센터를 통한 협박이든 폭력배를 쓴 폭행이든 청부 살인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모조리 박살내고 나면, 특히 정원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나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분노든 사랑이든 뭐든, 감정까지 포함해서 모두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처사임을 알았다. 이전에도 알지만 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지금은 명확히 인지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관계와 감정 모두가 바라던 대로 돌아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양 팀장은 자신이 입은 피해, 혹은 비가역적 변화에 대해 따질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최대한 정중한 사과를 하거나 그간 자신이 입힌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예선을 보면 그것도 옳은 결정은 아닌 듯했다. 예선은 지금 상태로 만족을 얻은 모양이니, 거기에 굳이 머리를 들이밀고 용서를 구하는 건 또다른 폭력일 수도 있었다. 그냥 가만히 살아가며 예선과 정원이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들어주는 게 최선일 것이었다.
양 팀장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돌아갔다.
이후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양 팀장은 이제 자신의 사고를 방해하는 요소가 없다는 사실에 경탄하는 한편으로 적응을 마쳤다. 정원은 인공 두뇌에 감정을 맡기고 살아가는 일을 다리의 각도가 영구히 변해서 뛰지 못하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지만, 양 팀장이 느끼기에는 반대였다. 예선에게 집착하게 된 이후의 삶이야말로 다리가 변형되어 뛰지 못하고 걷는 것이었고, 지금에 와서야 간신히 그 이상 상태가 교정되어 다시 뛰게 된 것 같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빨리, 효율적으로 뛰게 된 기분이었다. 어렴풋한 기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정량화가 가능한 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양 팀장은 개인적으로 계측하는 실질 노동 시간도 대폭 늘었으며, 그에 따라 처리한 일의 양도 질도 개선되었음을 알았다.
심지어 대인 관계도 나아진 듯했다. 전보다 훨씬 대하기 편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평이 종종 들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상사도 요즘 좋은 일이 있냐고 묻는가 하면 동료나 부하 직원들도 업무 외적인 잡담을 시도하는 경우가 늘었다. 특히 여자들이 주말 계획 얘기를 하거나 별 이유도 없이 먹을 것을 주는 일이 잦아졌다.
양 팀장은 이러한 당장의 변화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변화의 추세를 이대로 놔두어도 되는지, 삶의 방식을 유지해도 되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득을 기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반면에 예상되는 손해는 명백했다. 예선에게 집착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누구의 어떤 모습에서 또 무슨 욕망을 느낄지 모를 일이었다. 양 팀장은 자신의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안해졌다. 인공 두뇌 덕분에 그 두려움은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약하다고 해서 줄곧 품고 살 수는 없었다. 감정의 기복이 적어진 지금은 더욱. 양 팀장은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