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봉과 저체온증의 공포
원효봉으로 가는 길은 적당히 걷기 번거롭고 힘든 길이었는데, 백운대행 갈림길이 나올 때쯤엔 약간 완만해졌다. 이쯤에서 실개천이 된 북한천을 또 건너고 나니 안전쉼터가 나왔다. 상운사로 향하는 길목을 지킨 장승들이 보는 앞에서 벤치에 앉을 수 있는 쉼터다. 다만 마음이 별로 편하진 않았다. 장승 사이로 이어지는 길의 오르막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날이 더 흐려졌다. 기온이 떨어졌고 바람도 점점 심해졌다. 눈을 맞으며 걸은 적도 있고 비를 맞으며 걸은 적도 있지만, 시끄러울 정도로 강한 바람을 맞으며 걸은 적은 없기에 점점 불안해졌다. 잘 알려져있듯 산속에서 만나는 강풍은 대단히 위험하다. 무서운 속도로 체온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산바람은 사람을 죽인다. 나는 수틀리면 발길을 돌리기로 작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원효봉으로 북상하는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계단이 조성되어 있긴 했지만 적당히 납작한 바위들을 깔아놓은 것이라 모양이 다 다르고 거칠었다. 심한 오르막을 이런 길로 오르자면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더니 눈과 우박이 뒤섞여 날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견디기 불편할 정도로 시린데 방한용 마스크나 멀티스카프까지 챙기지는 않아서 급한대로 대중교통에서 썼던 kf94 마스크를 도로 꺼내어 썼다. 완벽하진 않지만 입김이 입가를 조금씩 데우고 빠져나가니 훨씬 살 만해졌다. 4월에 이 정도로 추위를 느끼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나마 마스크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때를 모르는 것은 꽃인가 눈인가)
상운사로 이어지는 화물용 열차 레일을 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속적으로 오르막이 이어져 지치는 길이었다. 여기가 북한산 입문자 추천 코스라고? 대단한 요령이나 장비, 혹은 근력이 없어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선 맞는 말이지만, 구경거리가 없는 상태가 길다는 게 상당한 감점 요인이었다. 마치 관악산 신공학관 루트같다. 쉽긴 하지만 보상 없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길은 꽃이 만발하거나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 하다못해 녹음이 우거지기 직전에 오는게 좋다.
2시 4분에 상운사로 꺾어 들어가는 갈림길 앞에 도착했다. 거기엔 상운사의 쉼터와 매장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유혹적인 팻말이 대대적으로 걸려 있었다. 사찰과 유혹이라니 안 어울리는 단어조합이지만, 강풍과 계단길에 시달리는 와중에 힘들면 쉬었다 가라는 문구를 보니 어디든 들어가 잠깐 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아마 쉴곳이 거기서 눈에 보였다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상운사가 그 자리에서 연등을 따라 몇 걸음을 더 가야 나오는지 알 수 없었고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초조했으므로 나는 원효봉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뭐든 필요할 때 여유를 누리려면 일찍 시작해서 시간을 비축해야 할 모양이다. 뭐든 느린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컵라면 사진이 눈물나게 유혹적이다)
편치 않은 계단길을 15분쯤 올라가니 북한산성의 북문이 나왔다. 문이라곤 하지만 역시 비교적 아담한 문으로, 지금은 문루가 사라져 위가 뚫려 있었다. 때문에 더 작긴 해도 원래 문루 없이 완성적인 구조를 유지한 암문들보다 더 쓸쓸한 폐허로 보였다. 그 모습을 롱패딩 차림의 노년 여성이 사진 찍고 있었는데, 수백 년 된 산속의 유적을 노인이 첨단 기기로 추억에 새기는 광경은 적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루도 문도 잃은 성문이 눈을 맞는다)
약간 더 올라가니 널찍한 마당바위가 나왔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시야가 트여 있어 맞은편의 산자락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었는데, 커다란 눈송이를 흩뿌리는 구름이 봉우리에 걸려 신선의 세계 바로 밑에 와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 봉우리 위에서 구름으로 덮인 세상을 내려다볼 때의 풍경을 운해라 부르는데, 여기서 보는 광경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수면을 바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듯했다. 심지어 바람도 강해서 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풍경을 조금씩 보여주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산 허리부터 위를 모조리 감추기도 했다. 매 초가 다르게 변하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1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광경이겠구나 싶어 감탄했다.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은 산행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도시에서는 희박하게만 체감할 수 있던 세상의 맥동을 지근거리에서 보자면 ‘나’라는 세계의 사소함을 알게 된다. 생각이 아니라 느낌으로 스미는 이 사실은 나를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이 진짜 눈보라가 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졌다. 길이 또렷하니 눈보라가 분다 해도 길을 잃고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조난당하지야 않겠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바람을 맞으며 산속을 걷는 일은 끔찍하고 위험할 것이다. 어둠과 달리 눈보라로 인한 시야 방해는 빛으로도 걷어낼 수 없지 않은가.
사진을 여러장 찍고 다시 원효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북한산성 성벽이 나와 헤맬 걱정없이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으나, 봉우리 끝이 다가오자 오르막이 가팔라졌다. 심지어 다소 어정쩡하게 깎아서 계단을 만든 암릉도 올라야 했는데, 젖은 바위를 잡을 곳도 없이 올라가자니 더 험하고 가혹한 길을 기어오를 때보다 마음이 불안했다. 산에서는 역시 네 발로 길 때가 가장 안전하고 즐겁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짐승처럼 변해 비난받곤 하지만 산처럼 짐승 짓을 하면서도 존중받을 곳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런 기회는 잡아야 마땅하다.
(아무리 산을 다녀도 젖은 바위는 무섭다)
암릉을 올라서자 이윽고 2시 40분에는 원효봉(505m) 정상이었다. 이곳은 봉우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넓은 마당바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한켠에 성벽이 보이는 이 자리에서 조망하는 맞은편 북한산 봉우리들의 모습은 영혼의 창문을 열어젖히는 듯한 장관이었다. 물론 어지간한 산봉우리나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경치가 시원스러운 법이지만, 원효봉에서 보는 백운대와 만경대의 모습에는 더욱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산을 올려다보는 것도 아니고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산 중턱 높이가 산의 웅대함을 가장 생동감있게 볼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야를 산이 가득 채우면서도 개방감 있게 트인 자리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성벽과 광활한 북한산을 한눈에 볼 자리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반쯤 눈이 덮여있는 북한산의 산세를 적절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맛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탁월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버스에서 내리고 2시간 반 정도 걸렸으니, 더 가벼운 장비로 날씨 좋을 때 온다면 2시간 이내에도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등산의 맛과 북한산의 멋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코스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불규칙한 계단길을 길게 오른 시간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입문자 수준의 초보에게 권하긴 어렵고, 산행에 거부감은 없는 사람의 북한산 입문에 좋을 듯하다.
아무튼 슬슬 배를 채워야 하는 시각이었던데다, 장소도 딱 좋았으므로 구석의 나무 사이에 앉아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는데...... 날씨가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바람이 엄청나게 심했다. 그동안 느껴본 것중 가장 심한 폭풍이었다. 일기예보 앱에서 초속 3.8미터라 했으니 여기선 8미터쯤 될 듯했다. 건너편 봉우리 앞에서 눈이 가로로 내리는 게 보였고, 냉기가 고어텍스 재킷 사이로 파고들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산바람이 문자 그대로 ‘살인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무식하게 이대로 버티면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꽃피는 봄이라고 방심할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300그램대 경량 패딩이나 방풍용 재킷 하나라도 더 가져와야 마땅한 날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도 대책 없이 빈 배낭을 매고 다니는 건 아니라, 한여름을 제외하고 늘 갖고 다니는 100그램대의 초경량 패딩을 꺼내어 입고, 여름에 처박아놓은 메쉬 머플러를 둘렀다. 역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아도 갖고 다니는 최후의 비상 장비가 사람을 살리는 법이다. 내 인생에도 정신적 위기나 커리어의 붕괴를 막아줄 최후의 비상 수단이 있으면 좋으련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