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기다림이 만든 소리

by 김형수

199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나그라 릴 테이프 녹음기가 있었다. 16mm 필름 촬영 실습에서 쓰는 동시녹음 장비. 묵직한 금속 상자에 릴 테이프를 물리고 녹음 버튼을 누르면, 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며 소리를 담았다.


소리를 담는다는 게 물리적 행위였던 시절이다. 테이프의 무게, 릴이 도는 속도, 녹음 레벨을 맞추는 손끝 감각—몸으로 기억하는 것들.


2001년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봤다. 그 시절이 떠올랐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가 어깨에 멘 나그라 IV-STC. 영상원에서 쓰던 바로 그 녹음기였다. 스크린 속 상우의 어깨에 걸린 나그라를 보는 순간, 릴 테이프를 물리던 손의 감촉이 되돌아왔다.

상우는 강원도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채집한다. 삼척 신흥사의 풍경 소리,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 맹방해수욕장의 파도 소리.


현장에서 소리를 담는다는 건 기다림이었다. 바람이 적당히 불기를, 새가 울기를, 파도가 밀려오기를. 원하는 소리만 골라 담을 수 없었다. 바람의 간섭, 먼 곳의 자동차 소리, 녹음기 자체의 미세한 잡음까지 함께 들어왔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 그게 아날로그 녹음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AI 사운드 생성 플랫폼에 “부드러운 숲속 빗소리”라고 입력하면 2초 만에 네 가지 버전이 나온다. 고음질, 로열티 프리. 원하는 길이, 원하는 분위기, 원하는 만큼.


상우가 강원도 산사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 담은 풍경 소리를, AI는 프롬프트 한 줄로 만들어낸다. 기술적으로는 AI가 만든 소리가 더 깨끗하다. 잡음도 없다.


그런데 상우의 녹음에는 AI가 만들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시간이다.


신흥사 풍경 소리에는 그날 그 시각 그곳에 불던 바람의 세기가 담겨 있다. 대나무 숲의 흔들림에는 촬영 당일 강원도의 기온과 습도가 배어 있다. 그 소리들은 2001년 어느 날의 강원도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소리다.


AI가 생성하는 파도 소리는 ’파도 소리 일반’이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해변이 아니다. 통계적으로 가장 파도 소리다운 소리. 누구의 기억에도 속하지 않는 소리.


은수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상우가 던진 한마디—“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쪽의 절규다.


어떻게 이 감각이 변하니. 어떻게 이 소리가, 이 질감이, 이 불완전한 떨림이 사라질 수 있느냐고.

LP 레코드의 미세한 스크래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필름 카메라의 거친 입자를 찾는 사람들.


아날로그의 잡음은 결점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갔다는 증거다. 기계의 물리적 한계가 남긴 자국이고, 그 안에 녹음하는 사람의 손떨림과 그날의 공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AI가 만드는 소리에는 이 자국이 없다. 시간이 지나간 적이 없으니까.


영화의 마지막. 상우는 억새밭에서 홀로 녹음기를 들고 서 있다. 은수와의 사랑은 끝났다. 그러나 그가 담아온 소리들은 남아 있다.


사랑은 변했다. 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1995년 영상원에서 돌아가던 나그라도, 2001년 상우의 어깨 위 나그라도, 이제는 쓰이지 않는다. 릴 테이프를 구할 곳도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장비들이 담았던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흐릿하고, 잡음 섞이고, 완벽하지 않은 채로.

완벽하지 않은 소리가 완벽한 소리보다 오래 남는다. 그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장면 캡쳐


※ 영화 《봄날은 간다》(2001, 허진호 감독) ※ 나그라(Nagra IV-STC) — 스위스 Kudelski사의 아날로그 릴 테이프 녹음기. 1968년부터 생산되어 영화 현장 동시녹음의 표준 장비로 쓰였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디지털 장비에 자리를 내주었다. 한국에서는 2002~2003년경까지 현장에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