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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y 15. 2023

어차피 크면 다 알게 되니까

동심을 지키는 어른의 마음

연출 노트를 만들었다. 이름처럼 거창한 내용은 없다. 나중에 언젠가 하고 싶지만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이야기나, 그냥 좋아하는 소재들을 적는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이나, 휴대폰 메모장에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걸 손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다.


최근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어른들의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적었다. 높은 확률로 내 취향에 들어맞는 소재다. 그 안에는 이미 삶의 구질스럽고 추한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겐 좋은 것만 거르고 걸러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이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어릴 때 받았던 마음들이 오래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여섯일곱 살쯤 인생 첫 통장을 만들러 은행에 갔을 때, 창구 직원이 새 통장 첫 장에 새겨 준 "날씨 춥지?" 같은 것. 직원은 매뉴얼대로 통장을 개설해 주면 그만인데, 처음 자기 이름이 박힌 통장을 만든다고 신난 아이 손님을 위해 한 마디의 다정한 안부를 덧붙여 주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존재만으로도 세상에게 환대받던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에 애틋해진다. 별게 다 신기하던 그때의 나에게는 깜짝 이벤트 같았다. 통장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일찍 배웠다. 그 직원은 당연히 그날을 잊어버렸겠지만, 그 인사를 받은 나는 여전히 엄마 아빠와 종종 그날 이야기를 한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지켜주려던 엄마 아빠의 노력도 생각난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잠자리에 들 때는 다음날 아침 우리 집에 어떤 선물이 생겨있을까 설렜다. 그 들뜬 기분은 여전히 어렴풋이 남아있다. 엄마 아빠의 노력은, 또래보다 빨리 진실에 도달한 친구의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라는 말에 의해 무참히 깨진다. 그 애와 하굣길에 언쟁을 하고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엄마 아빠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봤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둘의 표정 역시 기억난다.


어릴 때 온갖 체험 활동을 다 해봤다. 모내기도 배우고, 친환경 농법으로 기르는 밭에 우렁이랑 오리도 풀어주고, 숲 체험도 하고, 과학 센터에 가서 얼굴을 그려주는 로봇도 보고, 천문대에 가서 별도 봤다. 코엑스에서 <뽀뽀뽀> MC 뽀미 언니 사인도 받았고, 어린이날이면 근처 교대에서 하는 행사에서 페이스 페인팅을 받고 우쭐해져 돌아다녔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엄마 아빠 손 잡고 돌아다녔다. 그런 경험들은 한참 어른이 된 후에도 나한테 오래 남아서 뿌리 같은 게 되었다. 딱히 그걸 통해 뭔가 배워서라기보다는 - 모내기는 지금도 못 한다, 어릴 때 과학 센터와 천문대에 다녔지만 확신의 문과생이 되었다 - , 이런저런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만 골라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엄마 아빠의 마음 때문이다. 이제는 재미없는 것들도 많은 세상의 민낯 앞에 무방비로 서있지만 그때 그 마음을 떠올리면 정말로 힘이 난다.


나는 틈만 나면 소파에 누워 데굴데굴 굴러다니고만 싶은데, 그 시절의 엄마 아빠는 어떻게 어른의 삶을 사는 와중에도 쉬는 날이면 몸을 일으켜 이런저런 곳에 데리고 다녔을까? 사람이 많을 게 뻔한 날 사람이 많을 게 뻔한 장소에 차 없이 변덕스러운 어린이를 데리고 다니자면, 웬만큼 힘든 날의 출근보다도 훨씬 에너지가 많이 들었을 거다.


그 옛날에 받은 어른들의 마음을 잊지 않은 채, 나도 서툴고 유치하고 시끄러운 보통의 아이들에게 좀 더 다정하고 싶다. 노트에 적은 한 줄의 이야기가 커지고 커져 나중에 언젠가 정말로 그 비슷한 걸 하게 된다면, 그때 담고 싶은 마음 앞에 떳떳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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