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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y 08. 2023

봄의 리듬

일을 시작한 이후 대부분의 계절은 그때 맡아서 하던 프로그램으로 기억된다. 2018년 봄은 당시 준비하던 미니 시리즈 장소답사를 다니느라 전국의 벚꽃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아다니던 계절이었다. 2021년 겨울을 떠올리면 담당하던 일일 드라마 편집실에 있다가 첫눈이 온다는 소리에 옥상에서 눈 구경을 하던 순간이나, 밤씬을 찍기 위해 코가 시린 강바람을 맞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리던 순간 같은 게 떠오른다.


올해 봄은 조금 다르다. 편성에 변동이 생긴 덕분에 배정된 작품 없이 보내는 계절이다. 마음 쏟을 캐릭터도, 하루의 일정이 빼곡히 적힌 스케줄표도, 수십 개의 단톡방도 없다. 직장인답게 매일의 업무는 있지만 초과 근무를 할 만큼 바쁜 날은 거의 없다.


처음에는 작품과 작품 사이 애매하게 걸쳐진 시간 같아서 불안했다. 반년 일하고 반년 노는 삶이 목표라고 늘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정작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음에도 마음껏 일상을 즐기지 못했다. 밤새 나무에 매어두었다가 아침에 줄을 풀어도, 묶여있던 밤을 기억해 나무를 떠나지 못했다던 <괜찮아 사랑이야> 속 사막의 낙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일을 너무 사랑하고 일을 통해 쓸모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평균치보다 훨씬 많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업계에 속해 몇 년을 일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유를 여유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 지난달 문득 지금의 여유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 더 바빠지기 전에 이 계절을 온전히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뀐 건 그 다짐뿐인데 매일이 더 재미있어졌다. 주말 보드게임 여행(?)을 떠났고, 아끼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봄나물로 국을 끓여 대접하고, 벚꽃을 보며 얼음 가득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차가운 화이트 와인은 봄의 제철 음식!), 오랫동안 미뤄뒀던 전시를 봤다. 햇살이 풀잎에 닿아 만드는 초록빛을 오래오래 구경하고, 주말이면 엄마 아빠랑 빛 잘 드는 카페에 가서 책을 봤다. 점점 행복이나 재미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서 조금의 기미만 보이면 포착하고 누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빨래를 세 번이나 돌리고 식물들을 들여다보다 유튜브에서 한참 전부터 인기를 끌던 마녀수프를 만들어봤다. 마녀수프는 양파, 양배추, 당근, 샐러리, 감자, 양송이버섯, 토마토, 고기를 한데 넣고 뭉근하게 끓여 먹는 건강식이다. 삼십 분 이상 재료 손질을 했고, 중간중간 타지 않게 저어주며 마찬가지로 삼십 분 이상을 푹 끓였다. 십 분이면 다 먹을 한 끼 식사에 한 시간 이상을 들였다. 오래 정성 들인 건강한 음식을 나에게 대접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껴먹던 버터에 식빵도 한 장 바삭하게 구웠다. 맞다, 나 이런 거 좋아했지, 새삼스러웠다. 일에 치여 지낼 때의 끼니는 주로 '때운다'는 표현이 맞았다. 맛을 느끼기보다는 열량을 채워 넣는 것에 더 가까웠다. 전자레인지에 3분 30초 돌려 먹는 도시락, 책상에 앉아서도 먹을 수 있는 김밥이나 컵라면, 더 바쁠 때는 칼로리 바가 주식이 되었고, 그러다 일이 정말 많으면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르는 지경에 이르곤 했다.


올해 초, 힘을 빼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너무 비장해지지 말고, 과몰입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잊고 있던 새해 목표를 예상하지 못한 여유 덕분에 다시 새긴다. 곧 바빠지더라도 2023년 봄의 이 여유로운 리듬을 잊지 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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