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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fter 이후 Jul 14. 2024

사랑이 부족한 가치 상실의 시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던 어느 여름 날의 기록

“그거 얼마에요? 너무 비싸다.”

“얼마정도 들었어?”

“역시 돈이 최고지!”


너무도 가볍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 매일 보는 회사 동료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할 것 없이 묻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혼자가 된 시간에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후회한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누군가는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런 말이 어때서? 하지만 그런 거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재미없고 현실적인 어른이 되기 싫었던 것 같은데. 이런 말들보다 그 당시에는 어땠는지 느낀 것들이나 경험에 대해 묻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문득 서슴없이 가치를 매기고 묻는 나의 모습에 이질감과 거부감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도 있었던 것 같다. 버킷 리스트에 적어 내렸던 가득 찬 내 꿈과는 달리 내 잔고는 생활비로 비어간다. 하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은 넘쳐나는데,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정말 현타가 오는 순간은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동생, 친구들과 동료들, 연인에게 해주고 싶은 무언가를 마음껏 해줄 수 없을 때. 데이트를 하는데 잔고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내 행복은 그들과 함께하는 건데, 그 함께하는 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니 얼마나 슬픈지. 그래서 행복을 사기 위해 역설적으로 돈을 쫓고 있었다.



매일 루틴처럼 유튜브를 켜면 ‘20대 때는 이 정도 없으면 망한다’, ‘매일 하루 10분으로 돈 버는 법’과 같은 컨텐츠와 함께 ‘20대때 하지 않으면 후회하는 것’, ‘투자해도 되는 것들, 잘한 소비’와 같은 정 반대의 콘텐츠들이 함께 떠오른다. 아니, 어쩌란 말인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무시한 채로 좋아하는 재즈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예전에는 정말 질리도록 저런 콘텐츠를 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질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다 그새를 못참고 또 콘텐츠를 탐색한다. 금새 눈에 들어온 제목이 있었다. ‘가치 상실의 시대’ 였다.


동영상에서는 돈에 미쳐 있는 요즘 시대를 비판하고 있었다. 공감되면서도 동시에 최근의 내가 너무 ‘돈’에만 매몰되어 있던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문득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오늘 참 날씨가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서점에 가고 싶어서 집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점에 도착해 읽던 책을 가지고 나와 펼쳐들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었다.

1976년에 쓰여진 책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현대에 쓰인 것 같은지.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된 사랑이 가치를 잃어가는 배경과 개인의 삶까지 확대하며 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사랑의 가치가 폄하되는 가치 상실의 시대.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있었다.


유용한 사물, 유용한 인력과 기술은 모두 상품화 된다. 인격과 기술은 현재의 시장 조건에서 수요가 없으면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가치의 위계 질서에 반영된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있는 인간의 힘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협력적이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원한다. 그들의 '노동력'을 원하는 것이지 그들의 고유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고, 가치가 높을 때 팔기를 원한다. 이러한 구조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성을 잃는다. 기계가 되어간다.


하지만 기계는 사랑을 할 수 없다. 현대인은 이렇게 관계, 자연,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문장이 참 와 닿았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을 등외시하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게 되었는지 알 법 하다. 나조차도 주객전도가 되어 돈을 가장 상위의 가치로 삼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에리히 프롬은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사랑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서 배제 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목표와 낭만적인 목표가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많은 생각이 들게했다. 가령 많이 보이는 '낭만 챙기다가 가난해진다'와 같은 도덕적 허무주의가 팽배한 현실이 생각난다던지.


하지만 그가 말하기를, '현대 사회는 복잡한 현상이며,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상당한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구조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며 여지를 주고 있었다. 나는 이 문장을 세상에는 많은 상황이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책 제목이 사랑의 기술인 만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는가에 관한 기대가 있었으나, 결론은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정신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사랑도 잘할 수 있다.'


일정한 시간이 일어나며, 낭비하지 않고, 명상이나 독서 음악 감상에 시간을 쓰는 것, 과식과 과음하지 않으며, 객관성을 가지는 것, 자아도취에서 벗어나는 것, 몰입하는 것,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 결국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배울 것.


너무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결국은 본질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태어난 환경에서 머물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 다르지 않다면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그들은 결국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올바른 교육 방법의 부재. 예전에는 인간적인 태도를 전달하는 것이 교육이었다면, 현대는 지식에 대한 것만을 강조한다. 알맹이를 빼고 껍데기를 배우는 셈이다. 교육 제도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이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활동으로 보는 시각도 신선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그렇기에 에리히 프롬은 실제로 생산적인 사람들이 사랑을 잘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삶의 태도를 '사랑의 기술'이라며 전하고 있는 것이겠지. 한편으로는 여전히 슬프다. 이 사실을 알더라도 모두의 인식이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테고, 교육이나 정치적으로 틀이 마련되기를 바라야 하는데 정작 그런 것들에 관심 없는 사회인 것 같아서.




하지만 비관주의자가 되지는 말아야지. 물질 만능 주의자가 되지는 않아야지. 단순히 가격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눔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제서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러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거 어땠어요? 좋았겠다.”

“또 할 생각 있어요?”

“역시 사람이 최고지!”


나라도 사랑을 삶의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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