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 Sep 09. 2024

이거 힐링 영화 맞아요?

백만엔걸 스즈코

새로운 낙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일 솔깃한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를 봤다. 도망치고 싶은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발걸음의 기저에는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며 다른 방법을 찾는 것 또한 회피로 치부할 수 없기에 나는 새로운 낙원으로 말하고 싶다.


주인공 스즈코가 연고지 없는 낯선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백만엔이 모이면 미련 없이 떠나 다른 곳에서 다시 백만엔을 모으는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간략한 스토리만 들었을 당시에는 새로운 곳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힐링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힐링물에 대한 의심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독립을 결심한 스즈코는 같이 살자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 함께 부동산을 돌아다니고 집을 계약한다. 계약서를 확인하며 카페에서 잠시 숨을 돌릴 때 친구의 남자친구도 거주할 예정인 걸 통보받는다. 온전한 독립이 아니어도 직접 부동산에서 집을 보고 계약을 해본 자취생이라면 섬뜩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계약서에 이미 서명했는데 이런 식으로 통보하다니. 보증금, 위약금 등 여러 문제를 생각하면 쉽게 번복할 수 없는 일이다. 


입주하는 순간부터 스즈코의 고난이 시작된다. 같이 집을 알아봤던 친구는 남자친구와 이별을 함으로서 잠적하고, 스즈코의 룸메이트는 친구의 전 남자친구가 되었다. 초면인 남자와 단둘이 방을 나눠서 사는 삶? 옛날 순정만화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로맨스다. 성격 파탄자인 룸메이트와 적응하는 나날을 보여줄 틈 없이 찢어지게 된다. 



룸메이트는 스즈코가 주워 온 길냥이를 맘대로 버렸고, 스즈코 또한 그의 짐을 싸서 다 버렸다. 그 일로 인해 절도죄로 고소를 당해 전과자가 된다. 스즈코의 이력은 동네에 소문이 나 비웃음거리가 된다. 스즈코가 유치장에서 나온 후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할 때 탁구공이 튕겨나와 핑퐁을 주고받듯이 서로를 폭로한다. 겉은 평화로워도 그 속엔 알고 싶지 않은 여러 비밀이 보인다. 그런 스즈코가 유일하게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건 너무 어린 남동생밖에 없다. 이때부터 스즈코의 백만엔 여정이 시작된다. 


첫 시작은 해변가 식당 알바생으로, 두 번째는 복숭아 과수원 알바생으로, 세 번째는 식물 상점 알바생으로 지낸다. 백만엔으로 떠나는 이 여정에선 공통된 양상을 보인다. 낯선 곳에서 혼자 사는 여성으로서 느껴지는 위협감, 결국 떠나게 될 명분이 생긴다는 것.


해변가 식당에서 캣콜링을 하며 다가오는 양아치 남성을 피하고, 숙식이 제공되는 복숭아 과수원에서는 씻고 있을 때 욕실 앞을 서성이며 말을 거는 노총각과, 이방인에게 지역 농촌 활성화를 위해 홍보 모델을 강요하는 파렴치한 주민들까지. 여자 혼자 사는 거 더럽게 힘들다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으로 식물 상점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계속 돈을 빌리고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마지막 남자가 그나마 나은 남성이다. 사람들을 피하고 단절했던 스즈코가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던 곳이고, 백만엔을 다 모으면 떠날까 봐 일부러 돈을 빌렸지만, 스즈코는 이 사실을 모르니 스즈코의 삶에 위협을 줬던 남자들 목록에 포함된다.) 



스즈코는 안부 전화 대신 남동생에게 편지를 보낸다. 둘의 편지를 통해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갖고 있던 모든 걸 버리고 캐리어 하나로 떠돌아다니는 스즈코의 삶, 학교 폭력을 버티다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가해자와 싸우는 동생의 삶.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얘기를 나누지만, 마지막에 직면하는 동생의 편지를 받고 스즈코도 결심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처 받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곤 한다. 스즈코 또한 도망으로 시작했지만 그끝에 본인을 찾게 된다. 사람이 절망 끝에 다다르면 무기력함에 감싸져서 모든걸 리셋하고 싶어진다. 리셋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힘이 솟아날지는 의문이지만, 방어 기제로 시작된 스즈코의 리셋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는 내내 이거 힐링 영화 맞아?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엇갈린 상황 속에서 대사를 내뱉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후련함을 느꼈다. 마지막 장면만큼은 힐링 영화가 맞다. 비록 영화 속 장면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어도 '도망치고 싶다'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보기 좋은 영화다.

작가의 이전글 미디어 속 청춘이 내게 미치는 영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