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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Apr 28. 2019

사라짐, 4

[1_여는글]

 1.

 찰랑거리는 머리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여 열심히 기른 때가 있었다. 아는 사람이 머리숱이 많아 숱을 쳐보라는 제안에 미용실에 갔다 나오니 아주 지저분해 보여, 다음날 또 미용실에 갔다. 버섯같이 붕 뜬 머리에 무슨 일이 있어도 머리를 기르겠다 다짐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참여연대로 가는 길 골목엔 목욕탕이 있고, 그 옆엔 파랑머리, 라는 미용실이 있다. 길거리에서 밤을 보내고 목욕탕을 갈 때, ‘저런 곳은 자릿세가 비싸서 머리 자르는데도 비싸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파랑머리에 딱 한 번 가봤다. 들어가서 “삭발해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직원분은 나의 노란 옷차림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아 그러세요?”라고 하셨다. 머리를 자르러 온 옆 사람들은 흘끔 날 쳐다보았다. 밀기만 하면 되는 게 만 원씩이나 한다니. 

 짧지 않은 머리를 묶고 가위로 먼저 잘랐다. 직원은 바리깡을 들고 오며 “정말 삭발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두피에 진동 닿는 느낌은 잊히지 않는다. 귀 주변의 머리를 자를 땐 그 진동과 소리가 증폭된다.  지켜보는 사람이 듣는 바리깡의 소리와 당사자의 바리깡 소리는 조금 다르다. 전기톱 소리와 흡사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잔디 같던 머리가 허리 너머까지 왔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바람을 맞으면 숲에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머리카락들이 서로를 부비며 내는 소리가 그렇다.

 그 위에 시멘트를 발라버리면, 다시 자라날 수 있을까.



 2.

 공동체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을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저기

 공원에서 비를 맞는 여자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면, 기도도 길을 잃고 

 바닥에서 씻기는 꽃잎처럼 그러나 당신의 구두에 붙어 몇발짝을 옮겨가고……


 나는 떨어지는 모든 꽃잎에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나에게 와 잠을 청하면, 

 찬물이 담긴 주전자와

 마른 수건 하나,

 나는 삐걱거리는 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달라고 할까봐.

 꽃 핀 정원에 울려퍼지다 그대로 멈춰버린 합창처럼, 현관의 검은 우산에서

 어깨에서…… 빗물처럼

 뚝뚝,


 낮은 처마와 창문과 내미는 손


 위에서


 망각의 맥을 짚으며 

 또,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울까봐.

 그러면 나는 멀리 불 꺼진 시간을 가리켜 그의 이름을 등불처럼 건네주고,

 텅 빈 장부 속에


 혼자 남을까봐. 주인 몰래 내어준 빈방에 물 내리는 소리처럼 떠 있는


 구름이라는 물의 영혼, 내 몸속에서 자라는 천둥과 번개를 사실로 만들며


 네 이름을 훔치기 위해


 아무래도 죽음은 나에게 눈을 심었나보다, 네 이름을 가져간 돌이 비를 맞는다.

 귀를 달았나보다, 돌 위에서 네 이름을 읽는 비처럼,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섞으며 젖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공원을 떠나는 여자의 붉은 입술처럼, 죽음을 두드리는 모든 꽃잎이 나에게 기도를 전하는……

 여기서도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3.

 꼭 마음에 들거나 필요한 것만 산다. 버릴 땐 미련이 남아 버리지 않는다. 잃어버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내색하지 않지만, 속이 상해서 당장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계속 떠올리기 지긋지긋해서, 감정을 지어내는 거 같아서, 속상한 마음을 외면한다.


 그저 흘러가버리는 하루를 붙잡아두고 싶어서, 일기를 쓴다. 펜을 들고, 별거 없었을 것 같은 하루를 되돌아보며 웃겼던 일과 아름다웠던 것, 생각들을 써 내려간다. 별거 없는 날이 없게 된다. 

 누가 내게 “그날 뭐 했어?”라고 물으면 일기를 뒤적여야 한다. 그렇게 나의 기억을 일기에 맡기고 의존한다. 

5년 전부터 그 달의 일기만 유독 짧았다. 그 해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날이 자주 있다. 5년 동안 그 달의 기억이 몇 되지 않는다. 기억이 지워진다.


 미음을 애써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라면이나 힘껏 끓여 먹는 모양새다.



 4. 그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써야 할 것만 같은 상황들이 있고, 그 상황들 속에선 그렇게도 그 말을 하기가 싫다. 힘들어서 널브러진 사람에게 ‘그래도 우리 일어나자’가 아닌 ‘그래 하지마, 안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괴롭힘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추억이 사라졌다느니, 사라지길 바랄 그것이 사라지니 힘들다니 하는 진부한 얘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지어내는 것일 거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 한복판의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이젠 사라져버렸다. 일기장의 그곳에 대한 칸은 비어있으니까. 쓸 말이 축소되고, 이내 철거될 것이다. 


 어제의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셔츠 카라에 뱃지 두 개를 달고 누군가의 이름을 목에 걸었다.

 오늘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셔츠 카라에 뱃지 두 개를 달고 누군가의 이름을 목에 걸었다.

 내일 나는 천막 안에서 아침 집회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셔츠 카라에 뱃지 두 개를 달고 누군가의 이름을 목에 걸 것이다.

 뱃지가 닳고 부서져 못 쓰게 될 때,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셔츠 카라에 뱃지 두 개를 다는 시늉을 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목에 거는 시늉을 하며 집을 나설 것이다.

 (이 문단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없습니다)



글쓴이 -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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