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아있던 아이에게
노을이 지는 저녁이 방안에 스며드는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싫어했다. 이 이중적 감정의 원인은 매번 슬픔에서 시작되었다. '왜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일까' 하고 생각해볼 때에는 내 기억 속에 단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하교시간에 혼자 집으로 가기 위해 교문을 향해 걸어가면 운동장에 남아 축구공을 치는 둔탁한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나는 천천히 스며드는 저녁의 어두워져 가는 사위를 걸어가다 운동장 한편에 모인 한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드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왠지 모르게 그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왜 나는 혼자 있는 걸까, 그들은 어째서 나를 향해 웃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 곁을 지나면서 나를 향한 것만 같던 웃음 속에 문득 처음부터 내게 없던 것을 깨달았다.
아빠였다.
늘 마음의 준비 없이 어떤 일들이 닥쳐왔다. 그때의 시간을 지나서는 새아빠가 생겼고 아빠를 부를 수 있는 일들이 매일 생겨났지만 나에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과 낯선 정체성에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슬픔에 잠기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나는 나의 머릿속에 있는 행복에 대한 지속성들을 야위게 했다. 모든 두꺼워지고 팽팽해질 행복을 얇은 종이처럼 만들었다. 나는 그것으로 혼자만의 방에서 종이 접기를 했다.
자주 내가 가진 행복과 웃음을 의심했다. 새아빠로 완성된 나의 가족은 나를 향해 다가올 불안 앞에 잠시 달래줄 흰 솜사탕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책을 읽었던 것은 그것으로 감정을 숨기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좋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의 감정을 위해 책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여동생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나의 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온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학생 시절, 일방적인 새아빠의 학대 속에 몸을 피한 엄마와 여동생과 내가 차 안에 있었다고 했다.
아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대책을 강구하거나,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이 개선될 방향들을 이야기할 테지만 여동생의 눈에 비친 나는 그 속에서 침착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 난리에 책을 가지고 와서 전혀 그 상황에 놓여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조용히 책만 읽고 있었다고 했다. 잘 기억나지 않은 이야기라서 깜짝 놀랐다. 내가 그랬구나... 라면서 충분히 그때에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동생은 아직까지 그때의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금의 나를 생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더 큰 감정의 위기들을, 불행을, 슬픔들을...
그때의 나는 그런 것들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나에게 무지하기 위해 무지한 행동들을 했다.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현실 속에 일어나는 것들 속에서 멀어지는 무관심을 통해 분리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마음의 습관들이 기억의 강으로부터 떠밀려 온다.
그것을 깨고 나오려면 많은 변화가 필요할 것 같은 그런 일...
나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서 가장 먼 별에 도착했다가 돌아오는 긴 여정 같았다.
기억이라는 강에 내가 존재했지만, 아직 내게 오지 않은 구원자를 기다렸던 그곳에서 내면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 몸을 떨며 지나왔던 계절들이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서 있는 대지에 이따금 바람처럼 떠밀려왔다.
왠지 모르게 슬퍼지는 때에 나는 내가 접었던 어릴 적 종이학들을 모두 날려 보내는 상상을 한다.
마치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기억의 강을 떠나는 방식이라 믿고 싶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