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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Mar 20. 2022

모두가 이상하게 특별해진 그곳에서


그녀가 우울한 날이면 짧은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 채 회사에 나타났다. 퇴근시간, 사물함 앞에 서서 긴 머리의 가발을 한 손으로 벗겨낼 때 새어 나오는 웃음이 마치 빈방 속에 울리는 그녀의 혼잣말 같았다. 그렇게 하면 정말 기분이 나아질까... 그 이유 있는 행동이 내가 가진 진지함을 배반할 수 있을까,

그녀를 보며 내 의구심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그 어디에도 마음의 소속감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굳이 소속감을 붙이자면  각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저녁이면 혼자 체육관의 트랙을 반복해서 달리고 비트 강한 음악을 들으며 새벽 알바가 끝난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가거나  밤 사이 새로운 현실이 나타날 것처럼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떠나는 일. 우리는 그런 비 정의된 일들에 묶여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사소한 열정에 연속해서 골몰해 있었다.


제주도에 함께 간 것은 그때쯤이었다. 작은 짐 하나 없이 무턱대고 제주도에 내린 우리는 장소도 정하지 않은 채 공항 택시를 탔다. 기사님께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어디냐고 물었다. 기사님은 백미러로 우리를 보시고는 이곳에 놀러 왔느냐고 물었다. 오고 가던 이야기 속에 방을 얻을 만한 곳을 찾던 우리를 향해 기사님은 아직 미성년자인 것 같은데, 집을 나온 거냐고 넌지시 물었다. 우리는 미성년자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왠지 믿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내린 곳은 공항에서 가까운 이호테우 해수욕장이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니 머리를 식히며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 기사님은 택시에서 내려 우리들을 데리고 민박집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아는 민박집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우리를 위해 민박을 알아봐 주고 계신 것 같았다. 안거리와 바깥채로 이어진 파란색 지붕 안에서 할머니 한분이 나왔다. 두 분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다. 짧게 흥정을 마친 기사님은 우리에게 한 달 동안 지낼 방세를 말해주셨다. 우리는 가격에 만족해하며 그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속전속결로 눈앞의 바다와 한 달 동안 저렴한 방이 생기다니 놀라웠다. 감사인사를 전하니 기사님은 머리를 식히다 서울에 올라가라고 당부하셨다. 택시를 향해 돌아서는 뒷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생각에 잠겨 보였다.


아무 이유 없이 동행해서 손수 방을 알아봐 준 사람은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어떤 기억을 빚어내는 것일까? 미성년처럼 보일 정도로 배어 있던 삶의 불안이 빗물처럼 젖어있던 어깨를 들킨 날, 우리가 지닌 단어 속에 숨길 수 없는 마음의 배회가 그에게 어떤 쓸쓸함을 남긴 것 같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던진 공허한 노크를, 세상이라는 해변에서 언젠가 터트리고 싶었던 폭죽을 우리가 내쉬던 짧은 한숨 속에 보았는지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건네준 그분의 호의는 처음부터 내재된 나의 불안을 읽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열린 느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수욕장의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해변을 걷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많이 걷게 될 하루를 위해 정류장 근처 편의점에서 김밥과 라면을 샀다. 

도로 옆 테이블에 아침을 펼치고 먹고 있으려니까 편의점 사장님이 우리 곁에 오셨다.

김밥이 맛있냐는 말과 함께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하셨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카메라를 보고 둘이 여행 중이냐고 했다. 이야기 속에 왠지 알 수 없는 침묵이 드문드문 느껴졌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사장님은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좋겠다, 너희 나이였을 때 나는 미처 여행을 다닐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때 여행을 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 

그리고는 담배를 피우러 편의점으로 뒤돌아섰다.


그곳에 있던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삶에 다가와 준 그 다정한 고백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 말을 듣기 위해 우리가 거기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여행의 인과관계가 뒤바뀐듯한 느낌은 어떤 한 사람의 진짜 마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들은 고백으로 한순간에 친숙해져 버린 한 사람이 우리가 머무르게 된 곳에서 일상을 지속해왔다는 사실이 특별한 감회를 주고 있었다.


우리가 찾은 소속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의 아쉬운 마음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그들 마음의 빈 공중에 퍼지는 폭죽 소리를 함께 듣거나 

우리 안에 있던 사막의 밤을 함께 기다려주기 위해 잠깐의 시간을 내주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

그때에 거기에 있던 우리 모두는 조금씩 이상하게 특별해진 채로 서로에게 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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