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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by 성운

1.


눈병이 났다. 유정이 내 눈을 보고 눈병이 난 것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피곤함 때문일 거라 했다. 그보다 배가 고파서 그날은 돈가스를 먹고 일찍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통화를 했지만, 무슨 통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아팠던 모양이다. 이틀 전부터 심한 열이 났다. 유정은 괜찮을 거란 메시지 외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부분에 서운하지 않았다. 아파서 힘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번지점프 약속을 앞두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모두 나을 것 같았다.

열은 없지만, 잔기침이 계속되었다. 아프진 않았는데 간혹 마음대로 터지는 기침 때문에 곤란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코로나 때도 마스크를 최대한 늦게 쓸 정도로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번지점프 일정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빈 화면을 띄우고, 소설을 구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괜찮아진 후 처음으로 한 일이었다.

이주일 전, 어느 소설 작가의 소설 클래스를 신청했다. 한 장 분량의 소설을 써서 가는 것이 숙제였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강의실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기침이 나올 때마다 참았다. 목이 간질거려 기침을 참지 못했다. 마스크를 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소설 작가이자 선생님인 그녀의 소설집을 본 적이 있었다. 남편이 주인공인 소설이 많았다.

소설에는 아이가 없거나, 사고로 잃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물뿐 아니라 지인들도 그랬다. 미국이나 해외의 소재들도 활용되었다. 나는 소설집의 여덟 작품이 모두 작가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앞에 앉은 분부터 소설을 쓰려고 하는 이유와 8주 이내에 소설 완성 외에 하고 싶은 것을 소개해 볼까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한 명씩 소설을 쓰려는 이유와 하고 싶은 것들을 말했다. 준비한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수강생도 있었고, 대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수강생도 있었다.

소설 클래스를 신청했다고 유정에게 말했다. 유정은 재밌을 거 같다고 말하며, 다음에 같이 해라고 했다. 같이 하자고 할 걸 그랬다. 번지점프를 하자고 한 그날도 그랬다.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유정과 함께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선 출연진들이 번지점프를 하고 있었다.

저는 번지점프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말하자, 번지점프라는 단어에 집중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말할 때와는 달랐다. 아마 이게 소설을 쓰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소설을 쓰려는 이유에 대해선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번지점프를 하려는 이유는요? 친구와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친구가 만약에 하지 못한다고 해도 혼자 할 수 있나요?

소설 클래스를 신청 완료했을 때 메시지가 왔다. 소설 쓰려는 마음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말에 쓰지도 않은 소설을 이미 완성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정에게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유정은 기대된다. 보여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곧 있을 번지점프 일정을 생각했다. 그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요. 아, 같이 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것보다는…. 나는 결국 말해야 했다. 소설 선생님은 알 것만 같은 눈치였다. 함께 번지점프를 해야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 그게 소설을 쓰려는 이유가 되겠군요. 선생님이 웃었다. 수업이 끝났다. 유정과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기침이 나지 않아 마스크를 벗었다. 다음날부터 잔기침도 모두 나았다.


2.

유정은 가수 검정치마 콘서트를 예매해야 한다고 했다. 티켓 버튼이 오픈되길 기다리며 모 니터를 바라보았다. 유정과 만나기로 한 시점부터 같이 할만한 일을 찾았다. 군 제대를 한 뒤 곧바로 복학했다. 유정은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휴학을 했다. 복학을 한 뒤에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다녔다. 강의 중간 사이에는 토익이나 자격증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한경을 읽었다. 그때 누군가 내 짧은 머리를 만졌다. 뒤돌아보니 유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유정과의 거리는 가까워지진 않았지만, 비슷한 속도로 앞을 향해갔다.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무언가가 개입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티켓 오픈이 열렸다. 곧바로 티켓 예매를 클릭했지만, 대기자 수에 포함되면서 좌석 선택을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빨라야 할까. 얼마나 정확해야 좌석 선택에 들어갈 수 있을까. 또 못했다.

유정이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안 됐어. 다음엔 성공할 거야. 취소표가 나오거나.

먼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한 건 유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학교에 다녀야 했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유정을 떠올렸다. 유정과는 같은 동네도 아니었다. 여름밤이었다. 맥주나 한잔하자며 연락이 왔다. 유정은 다시 학교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이 지겹다고 했다. 유정은 배시시 웃었다. 바람에 머리가 살랑거렸다. 그날 유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 지였다.

나는 학교생활이 지겨운 만큼 유정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에 만나 유정의 회사 인근을 걸었다. 나는 걸음 수만큼이나 졸업을 하고 싶었다. 회사 인근엔 전봇대가 많았다. 전깃줄이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그사이에 구름이 보였다. 유정을 보면 유정은 나를 보고 있었다.


소설 수업 어땠어? 검정치마 티켓 예매를 실패한 뒤 유정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돼. 소설을 쓰려는 이유와 하고 싶은 거 말해보라고 했어.

뭐라고 했는데.

번지점프.

소설 쓰려는 이유는 말 못 했어.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았어.

음…. 내가 맞춰보고 싶네.

응. 맞춰봐.

넌 조금 전처럼 검정치마 같은 걸 놓쳐도 못 잊잖아.

나 역시 티켓 예매와 새로고침을 반복했다. 졸업을 하고도 한동안 취직이 되지 않았다. 유정은 그런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헤어지고 싶었다. 아마도 그때 헤어져야 했을 것이다. 유정은 내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게 일종의 동조라고 생각했다.


3.

아래에서 본 번지점프대는 생각보다 높았다. 약 55m로 17층 정도 되는 높이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 돈을 쓰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정은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너랑 나랑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해 보자. 번지점프 하면 서로 생각나게. 헤어져도 번지점프 하면 내가 생각날 거야.

엄청 높아. 올라갈 수 있지?

유정이 손을 잡았다. 나는 손을 잡는데,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갔다. 올라갈 수는 있을까. 이제 와서 올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할까. 그런데 이상하게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건물 안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한참이나 올라갔다. 중간 부분부턴 일정 간격으로 덜컹거렸다. 그래서인지 공포심은 더 커졌다. 잘 오셨습니다. 위에 있던 직원이 반겼다. 나는 유정을 봤다.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이미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왠지 유정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따금 숨이 막혀 왔지만 참을 만했다. 단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잘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실 건가요?

소설 선생님이 말했다. 소설을 쓰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고. 그건 때론 우리의 삶이 더 소설적이고 우연적이어서 도저히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오히려 소설은 말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이 많다고. 직원이 말했다. 내가 뛰는 데는 영향을 주지 않는 멘트였다. 나는 유정과 함께 뛰러 왔으니까.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4.

유정과 이별 후 다시 번지점프대에 왔다. 선생님이 말한 우연에 기대면서. 나는 그날과 달리 번지점프대 바로 앞까지 나아갔다. 그날 유정은 혼자 뛰었다. 혼자 뛰는 유정을 보면서 소설을 완성하는 것보다 유정과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헤어지면 번지점프 따위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했다.

잘 오셨습니다. 이번엔 혼자 오셨네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네. 그날 여자친구분만 혼자 뛰었죠. 그런데 지금은 뛸 수 있으신가요?

여전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올라오셨죠?


그날 이후 나는 번지점프와 상관없는 소설을 썼다. 처음엔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에 관해 썼다. 소설 속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알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끝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나왔다.

선생님은 첫날 여러분이 한 말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내 차례엔 번지점프를 했냐고 물었다. 나는 점프대 위까지 올라갔지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친구는요? 친구는 했습니다. 강의실에 모든 사람들은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게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하겠네요.

나는 전처럼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때 봤던 유정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유정은 하나, 둘, 셋 하고 뛰어내리더니 내 눈에서 없어졌다. 그렇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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