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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운 Oct 16. 2019

더 좋은 글 쓰기 <글쓰기의최전선>

좋은 글은 많으니까  흉내라도 내보자

ㅡ좋은 글은 많으니까 흉내라도 내보자


무언가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보를 전달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 내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서, 또 함축된 표현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뭐 이런 이유로 었다.


단어, 문장, 문단은 물감. 손가락은 붓.

그림도 예술이라면

흰 바탕에 글이 옮겨지는 도 예술이지.


약간 이런 느낌도 좋았고


단어와 문장으로 만든 문단은 내게 물감이었다.

나는 그 물감을 활용해서 그림 같은 예술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도 좋았다.


읽는 사람들이 어떨까라는 기대감

과연 나만큼 재밌게 읽을까

아님 반쯤이라도?


늘 이런 생각으로 쓰게 된다.


간결하면서 은유적인 무언가를 표현한 그래서 읽을 때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그림을 그려주게 하는 그런 글들이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적혀 있는 짤막한 글 한 줄, 시청의 글 한 줄

그런 글들은 늘 가슴이 찌릿하게 한다.

내가 닿지 못할 어떤 곳으로 오라고 손 짓 한다.

Sns를 하면서 병이 더 심해졌다. 없어도 있는 척, 뭔가 사진 한 장에 어울리는 글 한 줄, 약간 이 세상과 분리된 감성들을 남기는 재미로 살았다.

일상은 무료하고 늘 처절했다. 그런데 조금만 살짝 움직이면 다른 세상이 존재했다.

그래서 시가 좋아졌다. 아니 언제부턴가 시 이전에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그리며 상상했다.

윤동주

이름만 적어도 시 같은 존재.

시대에 맞서 별처럼 문학을 지켜온 고독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시는 한 시대를 넘고 넘어 오늘까지 부끄러움을 아는 위인으로 기억된다.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기억한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있지만 윤동주는 늘 곁에 있다.

하늘을 우러러 가을이 지나가는 계절에 낡은 노트 손에 끼고 한 줄 시를 쉽게 적어보려는 그 감성이 늘 곁에 있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시를 쓴다. 함축된 단어와 정제된, 며칠을 고민한 흔적 아니면, 불쑥 떠오르는 어떤 표현.

그런 표현을 연달아 쓰기 위해서는 평소 얼마큼 시에 빠져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일주일에 2번 정도 시를 쓴 적이 있다. 그게 모여서 100개가 넘었고, 나는 부족한 그 시를 아직도 좋아한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던 몇 편의 시가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에게 시가 갔었다.

나는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서 크라운제이처럼 그녀를 뺏고 싶었다.

뺏고만 싶었던 던 내게 그가 말을 걸었다.

나였던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미안합니다. 뺏지 못하겠습니다.


글쓰기는 늘 좋은 사람이 되게끔 질문을 준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답을 한다.


지금은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그때 그 순간만큼 쓸 용기가 없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늘을 볼 때면 떠오르는 게 있었고, 겨울의 한기, 입김, 창가의 김, 자라나는 꽃, 흙길, 풀잎, 들꽃, 구름, 햇살

뭐 이런 모든 게 좋았다.

글을 쓰기 전에 나도 그런 시인의 모습으로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역시 어렵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선 억지로 끄집어내고, 몇 시간을 고민해도 뭔가 우습고 유치하다.

그럼에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어떤 대단한 것을 적고 싶었던 욕망이 컸었다. 아니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던지.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내겐 다양한 시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마터면 인생에서 모르고 지나쳤을만한 한 위대한 시인이 있었다.

백석

외로운 백석이 그곳에 있었다. 밥과 반찬으로도 시를 써왔고,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흰 눈이 내렸고, 흰 벽에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부인을 그리워할 줄 아는 한 시인이 있었다.

이렇게 위대한 시를 나는 다만 몰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행운이라 생각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위대한 시들이 있을까.

닮고 싶었고 따라 하고 싶었다. 따라만 써도 좋았다.

이번엔 정말입니다. 거짓이 아니라구요.

아니라면 이 짧은 한 문장을 몇 백번도 쓸 수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좋아하는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한다. 소설, 에세이, 영화 또는 독서 리뷰, 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고 만족하지도 못할 정도의 수준이 나를 괴롭힌다.

재능이 없는 건 20대부터 알고 있었다.

음울한 20대의 나는 모 커뮤니티 카페와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우울을 썼었다.

그렇게 풀었다. 하소연할 곳은 없고 뭔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나의 거의 모든 것이 쏟아진 곳이다. 특히 커뮤니티 카페엔 완벽한 익명으로 솔직해질 수 있었다.

악플이 몇 개 달렸고, 의미 없는 댓글이 달렸다.

그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진심이 느껴졌고 좋은 글이라 했다.

그때부터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글 쓰는 것을 계속해왔다. 무언가를 잘하는 것을 위한 최초의 욕심은

글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음으로 시작되었다. 대학교때 학보사를 들어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특별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학보사에 들어간 이후 나의 글쓰기는 완벽히 분리되었다.

커뮤니티 카페의 글쓰기와 보이는 공간의 글쓰기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썼다.

보이는 공간에서의 나는 커뮤니티 카페의 나가 아니다. 나는 그때까지 내 본질에 가까운 모습은 커뮤니티 카페의 나라고 생각했다.

어떤 날엔 좋아하는 애가 내 글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이상했다. 내 글이 좋다는 것이 보이는 공간의 글이었을 테고,

커뮤니티 카페의 글은 아니었을 테니, 이상했다.

나는 분명 커뮤니티 카페의 글이 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 날은 어떤 평보다 좋았다.

머릿속에 그려지고, 쉽게 읽을 수 있고 다음 글이 기다려진다.

이거였다. 내가 원하는 글의 방향성

그녀가 제대로 말해주었던 것.

아주 만약에 사람들의 말 한마디 없이 글을 써왔다면, 내가 좀 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아닐 것 같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 말에 쉽게 흔들린다. 그리고 생각보다 관심 여부를 엿본다.

그게 sns로 증명되었다. 어느 날은 우울했고 진지하고 어느 날은 유치했다. 어느 날은 소설을 써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여행 에세이를 쓴다고 폼 잡다가 몇 번이나 실패했다. 실패를 연속하니 당연히 글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힘을 빼서 쓰고 싶은 sns를 하고 글쓰기 모임을 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쓴 글로 브런치 작가도 되었다.

그리고 또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억지로 쓸려고.

억지로 사람들에게 내 글을 읽게 하려고.

브런치에는 영화 리뷰를 핑계로 한 일상 에세이를 쓰는 중이지만 그렇게 재밌진 않나 보다. 

나는 재밌는데.


아마 나는 내 글을 재밌어하는 하는 사람들을 찾을 때까지 글을 쓸 것이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일상을 늘 흔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렇게나 끄적거리고 시를 토하며 이것이 나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어떤 영역, 한 점을 찾아 헤맵니다.

제가 그저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ㅡ체사레 파베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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