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숨결과 옥천이 품은 소박한 풍경을 찾아서
옥천이라는 이름을 되뇌는 때마다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진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음을 붙여 만든 “향수”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옥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그리듯 선하다. 그때부터 옥천이라는 지역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실개천이 흐르는 시골 풍경과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그곳은 상상만으로도 몽환적이고 소박하다. 그리고 순수하다. 옥천의 첫인상도 바로 그러했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편의 시설과 소박하기만 한 동네의 풍경에 살짝 당황을 했지만, 그것이 바로 옥천이라는 도시의 순수한 매력이었다.
수생식물원의 멋진 풍경 덕분에 옥천이 관광명소로 자주 오르게 되어 그 점에서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때 묻지 않은 옥천이라는 도시가 점점 상업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급해지는 아이러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자리한 곳은 '옥천 구읍'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구읍이라는 말은 새로운 도시가 생기기 이전의 구시가지라는 뜻이다. 구읍이라는 이름이 왜 이리 정겨운지 모르겠다. 옥천 구읍이라고 그 이름을 되뇌는 때마다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 정겨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지용 시인은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해 한때 그의 글은 모두 금기시되었다. 지금은 금지가 풀려 정지용 시인의 글에 대한 해석도 조금 더 활발하고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고, 옥천에서는 해마다 지용문화제도 개최하는 등 그를 기리는 사업이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은 편안하다.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레 펼쳐지듯 사실감이 있고 정겹다. 너무 정겨워 눈물이 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정지용 시인의 글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시인이 이야기한 고향의 아름다움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는 그분이 노래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알지 못해 질투가 날 지경이다.
그분이 쓴 글만큼 삶도 평안했으면 좋았으련만 그의 삶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다. 1902년 옥천에서 출생할 당시 아버지는 약방을 경영하시어 여유 있는 생활을 누렸으나, 어느 해 여름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단다. 그 와중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등 학업에 매진을 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었고,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어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모든 것이 추정일 뿐이고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망 장소도 평양직할시 또는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라고 추정을 할 뿐이다. 과연 그날의 진실은 어디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 그 흔적이 진실이 되어 세상에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옥천 구읍에는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정지용 문학관에서는 그분의 일대기와 글을 살펴볼 수 있다. 상당히 지식인이었고 유능했으며 똑똑했음을 알 수 있다. 문학관 바로 옆으로는 초가집으로 지어진 생가가 있다. 풍족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지근거리에는 육영수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육영수 생가는 으리으리한 한옥 건물에 건평만 해도 수천 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그에 반해 정지용 생가는 초라한 초가집 두 채가 전부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를 두 명이나 배출해 낸 옥천이라는 도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안타까운 사연을 지니지 않은 곳이 없다. 그 길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냥 설레고 행복하기만 하다.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그 여정을 즐겁게 마무리했다.
시인이 노래한 그 정겨운 고향의 풍경은, 세월을 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