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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Mar 15. 2024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고향이 어디예요?”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학과와 학번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아무도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질 않았기에 질문 자체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답이었다. 주민등록상 출생지를 말해야 할지, 실제로 성장기를 보낸 지역을 이야기해야 할지 매번 망설여졌다. 추후 논쟁의 씨앗(?)이 자라나지 않도록 결국 ‘법적’ 근거가 있는 선택지를 골랐다. 동시에 기민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는(??) 나름의 여백도 남겨두었다. “아, 태어난 곳은 서울이에요.”     



1995년 여름, 우리 집은 서울에서 경기도 고양시, 통칭 일산신도시로 이사 왔다. 이제는 신도시라 하기에 일산도 어느덧 30년 가까이 나이를 먹었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대답을 망설인 건 이 도시의 변천사와 나의 성장기가 궤도를 같이했기 때문이다. 막 이사 왔을 무렵 집 주변을 제외하고 허허벌판이었던 휑한 길거리. 중학교 3년을 쏟아부은 후곡과 백마라는 양대 학원촌. 일산 고딩들의 참새방앗간이었던 라페스타의 보드게임 카페, 그리고 아이스베리와 캔모아. 웨스턴돔이라는 또 하나의 상업지구가 개발되고 이젠 학교가 달라진 친구들과 쏘다닌 봉추찜닭과 수노래방. 신기하게도 내 삶의 굵직한 변곡점에 맞춰 일산의 모습도 바뀌어 갔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일산의 랜드마크, 호수공원이다.




     


일산(一山)이라는 지명을 상징하는 정발산과 함께 호수공원은 도시 정체성의 한 축을 담당한다. 호수공원이 보통명사가 아닌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가 막 생겼을 때는 진짜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주말에 가족과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게 유흥의 전부였다. 당연히 초, 중, 고등학교 내내 현장 체험학습 및 소풍의 단골 장소이자 졸업앨범 촬영 장소였다. 그래서 이곳이 지겹고 답답했다. 머리가 커갈수록 몸은 새로운 자극을 원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이라는 별천지가 눈 앞에 펼쳐지면서 일산은 구닥다리에 재미란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도시처럼 여겨졌다.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경기도민 말고 특별시민이 되는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별시민의 꿈은 녹록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며 자취를 부르짖었으나 애매모호한 통학 거리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조르고 졸라 3학년 1학기에 학교 앞 고시텔에서 지내긴 했다), 졸업 후 하필 첫 직장을 일산에서 다니는 바람에 서울 진출은 끝내 좌절되었다. 뜻밖의 횡재를 얻은 건 2016년 3월이었다. 서울에 있는 출판사로 이직하면서 당시 막 취업한 동생과 함께 사는 조건으로 부모님이 회사 근처에 투룸을 얻어준 것이었다. 성인 네 명이 한 공간에서 부대끼니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이에 부모님도 차라리 둘을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스무 살부터 시작된 독립 투쟁이 드디어 결실을 보다니! (엄밀하게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주민등록증 주소 변경란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 스티커가 붙었다. 특별시에 사는 특별시민이니까 이제 내 삶도 특별해질 것 같은 기분으로 마냥 들뜨고 설렜다.     





스물여덟 청년의 눈에 비친 서울은 환상의 도시였다. 25개 자치구 중에서도 마포구라는 지역이 가진 후광 효과까지 더해 가끔은 이 동네 주민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변화의 중심지에서 트렌드를 흡수하며 사는 삶이 좋았고, 사람들을 만날 때 동네에서 보자 해도 누구 하나 태클을 걸지 않았다. 채식을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포구라는 동네 특성이 한몫했다. 커피를 자양강장제가 아닌 기호 식품으로 향유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서울살이는 자못 어리숙한 20대의 나를 조금씩 다듬어주었고 취향이라는 색깔도 입혀주었다. 나는 변해가는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줘”를 따라부르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영화 대사가 미성숙함의 표본처럼 인용된다. 코로나 시대에 변화는 사회적 덕목을 넘어 뉴 노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마음을 주었던 장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야시장 혹은 일본어로 도배된 선술집이 들어서면서부터였을까. 바꾸지 않아도 괜찮은, 어쩌면 바꿀 수 없는 것까지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나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 업계가 그래요. 회사 생활하려면, 조직 생활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고 현실은 안 그래요. 언젠가부터 서울은 나를 바꾸려고만 들었다. 외향적이고 경쟁적인 태도를 갖추라고. 조직을 위해 일하라고. 영어 교육의 목적은 결국 시험 점수 향상이라고. 결혼 후 등촌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을 땐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이 정점에 달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바꾸려 했다. 아내니까, 며느리니까. 큰 딸이니까, 언니니까, 집에서 일하니까. 왜 그렇게 예민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다시 밖에서 돈을 벌겠다고? 그럼 살림은 어떡하고?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그럼 아이는 언제 가져?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울의 공기마저 나를 옥죄는 기분이었다. 이 도시에서 ‘나’는 사라지고 온통 ‘역할’뿐이었다. 누구도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죽겠다 싶어 한 달간 친정에서 지내겠다 하고 뛰쳐나왔다. 도망쳐 나와 간 곳은 그토록 지겹다 느끼던 호수공원이었다. 그해 7월 여름 거의 매일 아침 호수공원을 걸었다. 나무들이 울창해지고 벤치와 산책로 등 시설 일부가 정비된 것을 제외하면 그곳은 8살의 내가 봤던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한울광장도 자연학습원도 월파정도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누군가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1년 뒤 특별시민을 버리고 다시 경기도민이 되어 일산으로 돌아왔을 때도 틈나면 호수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공원의 사계절을 짧게나마 SNS에 기록했다. 초록색에서 다홍색, 밤갈색, 하얀색, 그리고 노랑과 분홍을 거쳐 연두가 다시 초록이 될 때까지,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모든 감각기관을 총동원해 인식했다. 한동안 서울에선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설날,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 생신, 다시 추석, 송년회,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었고 느닷없이 겨울에서 봄이, 돌연 가을에서 겨울이 돼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기록하는 일은 당시 내게 중요한 의미였다. 현재에 충실해지는 시간인 동시에 슬픔도 아픔도 “지나간다”고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오래도록 변치 않고 한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애써 바꾸지 않아도 좋다고,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도 괜찮다는 위로가 돼 주었다.   





  

2022년의 마지막 날. 상담 수련에 필요한 심리검사를 받으러 학교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했다. 여러 검사 중에는 HTP라는 그림 검사도 포함돼 있었다. 나무를 그려보라는 멘토 선생님의 말에 호수공원에서 제일 좋아하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다가올 봄을 상상해 가지에 초록 잎이 돋아나는 디테일도 빼놓지 않았다. 연필을 내려놓자 몇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이 아무는 어디에 있나요?” “호숫가요. 주변에 호수가 있고 다른 나무들도 있어요.” “만약 이 나무가 사람처럼 감정이 있다면 지금 이 나무의 기분은 어떨까요?” “음, 평온해요. 넉살 좋은 할아버지처럼 풍경을 바라보고 있거든요.” “이 나무에게 소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주변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네요?” “음... 네. 수호신 같은 존재라서요.” 순간적으로 나온 대답이었지만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봐도 그림 속 나무, 아니 공원에 실존하는 그 버드나무라면 왠지 그럴 것 같다. 이 모습 그대로 지켜주고 싶다고, 당신이 훼손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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