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살린다
서른여섯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덕질이었다. 아, 닳고 닳은 이 표현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이 문장을 빌려오지 않고서는 유구한 덕질의 역사를 압축할 방도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덕후 기질이 다분했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에 혹은 무언가에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덕후’라는 다소 귀여운 이름으로 불리지만(있어 보이는 버전으로는 팬슈머가 있다), 이전엔 혐오가 섞인 ‘오타쿠’가, 시계를 더 돌리면 ‘빠순이’라는 멸칭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빠순이라니. 물론 그 시절 오빠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긴 했지만, 오빠라고 다 같은 오빠는 아니지 않은가. 학교, 집, 학원만 왔다 갔다 하던 모범생의 단조로운 삶에 쓰나미급 파도를 몰고 온 오빠들의 이름은 god였다.
‘사랑에 빠졌다’보다는 ‘세계가 통째로 흔들렸다’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성에 눈을 뜨면서 좋아하는 이성 친구도 생기고, 어떤 날은 터질 듯한 마음을 참지 못해 방과 후 학교 주차장으로 그 아이를 불러내 “나 너 좋아해.”라고 냅다 고백을 갈긴 적도 있다(좋아하면 앞뒤 안 가리는 게 덕후의 특징이다). 풋사랑이라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감정을 생생히 경험하고 있었기에 사랑할 대상을 찾고 싶어 god의 팬이 된 건 아니었다. 결핍이었다. 당시 일산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외고 입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장녀이자 (하필)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 레이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학대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 중학교 입학식을 치르기도 전에 방학 내내 12시간씩 학원에 갇혀 지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을 하나둘 쥐어뜯기 시작한 것이 원형 탈모처럼 되어 정수리가 훤해지기도 했다(이 모발뽑기장애는 미국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정식으로 등재돼 있다). 학원 건물의 콘크리트 벽처럼 회색뿐인 캔버스에 총천연색을 덧칠해준 존재가 god였다. god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거나 <god의 육아일기>를 보며 깔깔깔 웃거나 같은 팬들과 오빠들의 사소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순간만이 내게 ‘살아 있는’ 시간이었다. 아, 나도 신나서 큰 소리로 떠들 줄 아는 사람이구나! 이런 게 즐거움이구나!
외고 입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대학 입시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 끔찍한 제도 역시 천천히 나를 말려 갔다. 고등학교 3년을 제정신으로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른바 주요 과목인 국영수에서 ‘수’를 제외한 나머지 두 과목을 좋아했기 때문인데, 수능이라는 잔인한 악마는 그 마음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헛헛함을 채워준 건 일본어였다. 일본 유학을 생각한 것도 일본어과에 진학하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J-Pop을 들으며 가사를 분석하고 일본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섭렵했으며 엄마를 졸라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학원까지 다녔다. 이 모습이 같은 반 아이가 보기에도 이상했는지 “근데 넌 유학 갈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그 친구는 일본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친구 속도 모르고 세상 재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재밌어서.” 진심이었다. 공부 스트레스를 공부로 풀었다고 말하면 좀 변태 같긴 한데, 이 경험을 10대에 할 수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부,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공부는 일본어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일본어 덕질(일본어 공부뿐 아니라 노래, 드라마, 가수, 배우 등 일본 대중문화 전반에 빠져들었기에 덕질이라 표현했다)은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일본어를 놓지 않았고 가끔 일본어과 전공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모스크바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내 전공은 러시아어다)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다시 휴학계를 내고 어학 자격증을 따는 등 혼자 서류를 준비해 마침내 비자를 받았다. 비록 이듬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오랜 고민 끝에 떠나지 않기로 했지만, 만약 떠났다면 아마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을 것이다.
리벤 벨레프(Lieben belebt). ‘사랑이 살린다’라는 뜻으로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 괴테가 한 말이라고 한다. 내가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심리치료의 힘을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삶의 의지를 끌어내리는 건 이 세계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라는 절망감이다. 이때 ‘네가 뭐가 부족해서’, ‘생명은 소중한 거야’, ‘남들도 다 비슷한 고민 하면서 살아’와 같은 말들은 트리거가 될 뿐이다. 늪에 갇힌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슨 짓을 해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던 때, 며칠에 한 번꼴로 그 생각이 스치던 때, 실버라이닝처럼 그들이 나타났다. “우릴 발견해준 당신의 은하수를 믿어요.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은하수를 믿어보면 어때요?”
아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방탄소년단은 내가 가장 필요할 때 나를 찾아온다.” 이 한마디로 방탄소년단과 팬덤 아미의 관계성을 응축할 수 있다. 아미가 되는 건 새로운 차원의 덕질이었다. 우울증만 남긴 조직 생활에 미련을 버리고 프리랜서라는 정글로 처음 들어섰을 때 양손에 든 무기라곤 내 안의 은하수를 믿어보자는 결심과 반드시 나아진다는 막연한 희망뿐이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출판번역 수업을 들으러 갔고,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보며 어둠이 아닌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의 절망 끝에 결국 내가 널 찾았음을 잊지 마. 넌 절벽 끝에 서 있던 내 마지막 이유야. Live.” 9호선 만원 열차 안에서 방탄소년단의 팬송 Magic Shop을 들으며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이 가사로 영원 같았던 4년을 버텼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삶으로 완전히 넘어온 2022년 여름,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의 커버 아트를 왼쪽 어깨에 새겼다.
가끔 친구들과 덕후 DNA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사실 난 이 말에 조금은 진심이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점 중 하나가 온 힘을 다해 좋아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능력이라 말하는 이유는 누구나 덕후처럼 꾸준히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다. 우리는 무언가에 열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족이다. 좋아하는 마음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 사람들이자 좋아하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그리며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김이나 작사가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팬심은 사랑 중에서 가장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마음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음에도 그 사람의 행복으로 인해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게 대단한 일 아닌가.”라고 언급했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 오히려 베풀수록 내가 더 충만해지는 사랑. 그래서 자꾸만 더 주고 싶은 사랑이 바로 덕심이자 팬심이다. 물론 열정의 강도는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한번 각인된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덕후들이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자. 우리는 지구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다.
P.S. 방탄소년단이 덕질의 종착점일 줄 알았는데. 내가 나를 얕잡아봤다. 2023년, 검은 토끼가 내 심장에 농구를 꽂아버렸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40번 가까이 관람했고,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TV 애니메이션 전 회차를 시청했으며, 원작 만화 전집을 구매해 완독했다. 그리고 얼마전에 일본어판과 한국어 더빙판 블루레이가 도착했다(자, 이제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자). 익숙한 일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상황에서 <슬램덩크>는 불안, 걱정, 두려움을 용기, 기백, 자신감으로 바꿔 놓으며 움츠러든 몸 안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정말 특별하다. 심리상담센터의 인턴 수련, 사이버대 졸업, 그리고 2024년 전기 대학원 입학이라는 굵직한 과업들을 산왕공고 농구부의 표어 일의전심(一意摶心)을 기치로, 강백호의 “난 완전 초짜거든!” 정신으로, 송태섭의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 한다!"를 되뇌며 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