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미치도록 이해받고 싶었다
읽고 쓰고 옮기는 삶을 동경하다 직접 그렇게 살기로 했다. SNS에 자기소개 문구로 쓰고 있는 이 문장은 정체성의 한 축에 ‘쓰는 사람’이 있음을 드러낸다. 옮긴이로 사는 삶은 이제 막 4년 차에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쓰는 삶은 자각하기에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글쓰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 때 매주 검사받던 일기장이다. 그때 썼던 일기 내용이 아닌 담임 선생님의 감상평이 선명하다. “시계꽃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구나.” 무슨 일기를 썼는지 전혀 기억나질 않지만, 초등학생 주제에 꽤나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했기에 선생님이 저 짤막한 평을 남기며 난감해했을 표정이 그려진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죽을 때 느낌은 어떨지, 죽어서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너무 슬플 것 같다는, 이걸 조숙하다고 해야 할지 소아 우울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이야기들을 일기장에 적곤 했다(소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자주 이야기한다는 항목이 있는 걸로 봐서 가능성이 없진 않은 듯하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예민하다’의 뜻만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걸핏하면 우는 아이. 별것 아닌 것에 크게 반응하는 아이. 짜증과 신경질이 많은 아이. 하여간 예민해. 나는 이 말을 지겹도록 듣고 자랐다.
내향적이고 불안이 높은 기질적 특성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말보다 글이 편했다.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그림그리기와 글짓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도 남들 다 도화지와 물감을 고를 때 혼자 원고지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게다가 나의 보물 1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다. 학종이에 휘갈겨 쓴 쪽지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가지고 있다. 가끔 대청소를 할 때 케케묵은 편지들을 들춰보곤 하는데, 10살, 11살 아이들이 무슨 편지를 이렇게나 주고받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뭐 대단한 내용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친구에게 속상하고 서운한 마음, 사과하고 싶은 마음, 고마운 마음 등 충분히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운해’, ‘고마워’, ‘미안해’ 이 세 글자 뒤에 담긴 복잡한 마음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무언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아이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고심하고 또 고심해 고른 단어를 종이에 써 내려가는 일이 더 편한 건 당연했다. 일상생활이 글쓰기 연습이 된 까닭에 어쩌다 보니 학교에서 상도 받고 논술 전형으로 대학도 입학하고 번역가로 밥벌이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 글쓰기는 성취 도구가 아니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 수단이자 소통 수단이었다.
소통이라고는 썼지만 실은 제발 나를 이해해달라는 외침에 가까웠다. 정말이지 미치도록 이해받고 싶었다. 내 생각과 감정을 예민하다는 형용사 하나로 뭉뚱그리는 행위가 언젠가부터 참을 수 없이 갑갑했다. 분명 안에서 어떤 느낌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요동치고 있는데, 나는 느껴선 안 되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하호호 웃고 지나간 대화 주제도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머리를 콕콕 쑤셔댔다. 그때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나. 아깐 괜찮았는데 지금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내가 문제인가? 나만 그런 건가? 나 같은 느낌을 느끼는 사람은 없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확장되기 시작하면 노트북을 켜고 뭐라도 써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넘치는 생각과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표현에 미숙한 성격에 더해 사회생활을 하며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이 배가 될수록 감정 그릇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넘치기 직전이었다. 생존 메커니즘이랄까 본능이랄까 하여튼 직관적으로 이 넘치기 직전의 그릇을 그냥 내버려 뒀다간 크게 X 될 것이라는 위험을 감지했고, 이때 처음으로 SNS에 뭔가를 끄적였다. 익명성이 가장 크게 보장되었던 텀블러라는 플랫폼을 통해 표현하지 못한, 말하지 못한, 꾹꾹 억누른 감정들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때 글들은 모두 분노와 수치심, 무력감을 품고 있다.
타인의 이해를 갈구하며 시작한 글쓰기가 전환을 맞이한 건 2020년부터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오래 사로잡혀 있어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그때 서야 알아차렸다. 정작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당시 받았던 부부 상담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는데, 나는 징글징글하게도 상담실에서 매번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무슨 말만 하면 눈물부터 터트리는 모습에 혐오감을 느낄 무렵 퍼뜩 질문이 스쳤다. 근데 넌 왜 우는 거야? 너는 왜 울 수밖에 없는 거야? “표현을 하려고 해도 잘 안 돼요. 눈물부터 나요, 선생님. 저도 알아요, 제 문제점. 감정표현 잘 못하고 참고 참다가 나중에 폭발하거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 사실 저도 차분하게 제 감정을 말하고 싶은데, 입을 떼면 그냥 눈물부터 나요. 진짜 울기 싫은데 조절이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대답은 명료했다. “억울해서 그래요.”
무엇이 그렇게 억울했을까. 처음부터 충족될 수 없는 욕구,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해줬으면 하는 그 욕망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속에서 뭐가 올라올 때마다 ‘예민한 나’를 너무 의식해 내 감정을 믿지 못했고, 그래서 참는 게 배려고 사랑이라 여겼다. 느껴선 안 되는 감정을 느끼는 내 마음을 누구에게 표현하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그 사람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게 가장 두려웠다. 매번 눈물을 쏟으면서 내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게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렇게 남들에게 이해받고 싶어 했으면서 정작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던져진 작은 돌이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키듯 그 시점 이후 삶은 급류에 휩쓸려가듯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겉보기엔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으나 확실히 내면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대와 말다툼이 일어나면 여전히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생각이 정리되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해달라는 글이 아닌 나를 이해하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와 같은 SNS에 공개적으로 쓴 글을 올렸다. 2W 매거진에 처음 투고한 시점도 이때다. 정말이지 삶은 모순덩어리인 게 나를 이해하려 애쓰자 기꺼이 나를 이해해주려는 고마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전과 다르게 반응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진 않았다. 오래전부터 두려워하던 일,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면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어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알았고(그래서 내린 결정이었고) 지금도 똑같다. 그건 필연적인 이별이었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지금껏 해왔던 대로 살라는 말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아직도 표현은 어렵고 나를 이해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나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분석해야 하는 상담 수련이 버겁다. 솔직히 귀찮고 막막하고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미루기 십상이지만, 어느 책 제목처럼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양가감정이 하루에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쓰고 표현하고 내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글쓰기가 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개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뿌듯한 건 글에서 억울함이나 분노, 수치심, 무력감의 색깔이 상당히 옅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지 자원을 주제로 연속적인 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의 성장의 증인이자 증거다. 이제야 진심으로, 아주 조금은 떳떳한 마음으로 글쓰기가 외부 세계와의 접촉 수단이자 소통 수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