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으니까
상담심리학 강의를 듣다 보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내면의 콤플렉스가 건드려졌단 뜻이다. 특히 유아가 어머니와 맺는 초기 관계 경험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대상관계이론 혹은 애착 이론이 등장할 때 화가 나고 분하고 가끔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 나이 먹고 아직도 부모 탓을 하는 자신이 찌질했지만, 감정이 올라온다는 건 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엄마가 이랬다면, 우리 집이 이랬다면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길었던 자기 비하의 시간이 줄어들진 않았을까. 나도 자신감 있고 당당했을까. 나도 봄날의 햇살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따위의 생각의 소용돌이로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감정의 외피가 원망의 형태를 취했든 분노 혹은 억울함의 포장지를 둘렀든 알맹이는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어린아이의 외침이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까지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진짜 내 모습으로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가 더 정확하겠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혀온 핵심 신념 중 하나다. 이 망할 생각 때문에 건강한 연애는 항상 요원했고 그나마 제대로 된 연애라고 여겨 결혼까지 했던 관계도 실패로 끝났다. 딱히 교우 관계에 문제가 있진 않았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라는 사람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불안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어렸을 적 엄마는 종종 내게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라는 말을 했는데, 밖에서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난 이기적인 아이야. 그러니까 나를 숨겨야 해. 나를 드러내면 모두 싫어할 거야. 다들 나를 떠나갈 거야.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고, 웬만하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의사에 맞춰주려고 했다. 그게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패턴이었고, 이 패턴이 주는 보상은 착하다는 뻔하디뻔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남을 속일 순 있어도 자신까지 속일 순 없는 법이다. 나이가 들수록 착하다는 칭찬은 듣기 거북했고 실제 나는 착하지도 않은데 잘도 저런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급기야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라는 급발진을 하기도 했다. 알려준 적이 없으니 오해를 사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J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분명 아직도 ‘가엽고 하찮은 나, 외롭고 이해받지 못하는 나’라는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학교 1학년 2학기 교양 영어 수업에서 만났다. J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냥 스무 살의 어느 시점부터 항상 옆에 J가 있었고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몇 살때부터 스스로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할 수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엔 J의 감수성에 끌렸던 것 같다. J는 문학, 특히 한국 문학을 좋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당시 사회과학 서적만 읽던 나와 다르게 그녀의 언어는 섬세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감정이 올라오면 그 에너지에 압도당해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며 어버버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개방을 한 적이 없으니 감정을 전달하는 과정이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여기서 J의 초능력이 발휘되었는데, 그녀는 서툴고 거칠게 표현한 내 감정을 하나하나 가다듬어 적확한 언어로 정리해주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때 깨달았다. 나는 J처럼 되고 싶어 책을, 문학을,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J는 감수성의 저변을 넓혀주고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독서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법도 내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J를 통해 차츰 익혀 나갔다.
학교라는 공간에 같이 있을 땐 모르지만 졸업을 하고 나면 ‘친구’라고 묶인 집단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는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이 이어주던 공통점도 희미해진다. J와 나도 그랬다. 졸업 후 나는 취업을 했고 J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입장의 차이, 사정의 차이, 환경의 차이라는 것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어리고 미성숙했던 나는 그것마저도 섭섭했다. J도 회사에 들어갔으면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너무 좋아하는 친구가 나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애써 못된 마음을 숨겼지만 섬세한 J라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J는 여전히 옆에 남아 주었고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으며 “왜 그거 있잖아, 이런 느낌”이라고 말하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술술 풀어주었다. 진짜 내 모습으로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해로운 연애를 할 때도 J는 “널 없애서 그 사람한테 맞춰주고 매달려서 하나가 되기보단 그냥 차라리 너 혼자로 1이 되는 게 나아”라고 딱 잘라 말해주었다. J와 있으면 나 혼자의 모습도 괜찮다고, 진짜 내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여름, 가장 친한 친구를 처음 신혼집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J는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헤어짐을 부추긴다거나 무작정 참아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감정에 확신이 없던 때라 나는 이 느낌이 맞는지, 이 감정이 맞는지 물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이때도 J의 대답은 같았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게 맞아.” 우리는 커피와 타르트와 스콘을 먹었고, 그날 공개될 방탄소년단의 신곡 Permission to Dance 이야기를 했으며, J의 입덕 계기와 최애 멤버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여름밤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택시 타는 장소까지 J를 배웅했다. 집 건너편의 주유소였는데 이대로 J를 따라나서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이 막히는 저 집으로 도무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택시가 왔고, 우리는 다정히 손을 흔들었고, 나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답장이 왔다. “나는 진짜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네 편이고 항상 응원해. 세상에 한 명쯤은 너를 무조건 응원한다고 생각하고 힘내서 너무 슬프지도 너무 상처받지도 말고!” 이 시점에서 확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토록 찾아 헤매고 갈구하던 사랑은 이미 J가 내게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이버대 상담센터에서의 1학차 수련이 슬슬 마무리되어가던 2023년 6월 하순의 어느 날, 첫 사례가 배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에게 첫 내담자가 생기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하루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초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녁 10시, 상담센터 행정 근무를 마치고 나온 거리에서 2년 전 J를 마중 나갔던 주유소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학교 상담센터는 이혼 전 신혼집과 5분 거리에 위치하며 그 주유소와는 짧은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날의 공기와 날씨, 손을 흔들며 헤어졌던 우리, J가 해줬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보일 듯 보이지 않던 길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목표가 드디어 손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찾아보고 더 들여다보고 수퍼비전에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내보일수록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과 불안이 점차 누그러들었다. 잘해야겠다는 마음보다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졌다. 어쩌면 J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어 이 공부를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으니까. 엎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그 사람의 한마디 말이면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