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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Mar 15. 2024

나의 헤테로토피아

도망치고 싶지만 살고 싶을 때 미술관에 간다

그림은 오랫동안 내게 수수께끼였다. 그림과 나 사이는 삼각함수와의 사이만큼 요원했다. 학창 시절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과 미술이었고, 수채화든 데생이든 판화든 파스텔화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재능과 소질이 영 없는 게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음악과 달리 미술 작품은 봐도 봐도 별 느낌이 없었다. 가끔 박물관에서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회화를 보면 신기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러시아 어학연수 당시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 미술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을 포함해 크고 작은 갤러리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도 부끄럽지만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생각나는 건 크렘린 박물관에서 본 거대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과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묘에 방부제 처리되어 미라처럼 누워있는 그의 시신이다.)     





이번 생에는 미술과 친해지기 글렀다 싶었는데 기적적으로 흥미를 붙이게 된 건 방탄소년단의 RM 덕분이다(덕질이 이렇게나 좋습니다).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기 전인 2021년 봄, 일상이 얼마나 무료했는지 ‘나도 남준이 따라서 미술관 한번 가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느닷없이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에서 얼핏 국립현대미술관을 본 것 같아 그대로 홈페이지로 들어가 전시 관람 예약을 했다. 무슨 주제의 전시인지, 어떤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미술관에 방문했고, 러시아에 있을 때보단 진지한 태도로 해설까지 꼼꼼히 읽어가며 작품을 관람했다(물론 중간중간 하품도 하면서).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그림에 발걸음을 잡힌 것이다. 그 그림은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나마 내가 신기하다고 느꼈던 종류의 그림도 아니었다. 캔버스엔 선, 면, 색채뿐이었다. 그렇게 유영국 화백의 <산>(1968)이라는 작품 앞에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유영국, <산>, 1968 / 이미지 출처: 서울아트가이드




푸릇하고 싱그러운 초록색이 아닌 서늘하고 날이 선 청록색 산등성이가 교차하고 그 가운데로 깊은 바다 같기도 하고 짙은 밤하늘 같기도 한 짙은 블루 컬러의 그라데이션이 펼쳐진다. 작품의 구도와 색채를 빤히 쳐다볼수록 뭔가가 파도처럼 쏴아 밀려왔다. 가장 먼저 그림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엔 심연, 슬픔, 비장, 평온이라는 단어가 차례로 떠밀려왔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감상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처음 맞닥뜨린 낯선 감정 앞에서 나의 언어는 무력했다.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주는 아니어도 이따금 미술관에 갔다. 부암동의 환기 미술관, 청담동의 루이뷔통 갤러리는 둘이서 갔고, 혼자가 되고 나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덕수궁관, 석파정 서울 미술관, 국제갤러리, 학고재, 서울시립미술관 등을 찾았다. 작년 여름 혼자 부산 여행을 갔을 때 2박 3일 일정 중 첫날과 마지막 날은 미술관만 다녀오기도 했다. 하나 아쉬운 건 2021년 여름 예술의 전당에서 피카소 전시가 크게 열렸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상대방과 대판 싸운 후 그대로 반대편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와버리는 바람에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쓰면 미술 애호가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미술관으로 향하는 목적은 따로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다.     




1인 가구의 가장이 된 후 삶의 무게를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은 도망치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라는 말의 무게감이 종종 스스로를 숨 막히게 했다. 이게 맞나.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서 혹시라도 실패하면? 사교육계도 출판계도 지긋지긋해. 나는 왜 이렇게밖에 돈을 벌지 못하는 거지? 아, 몰라 오늘은 그냥 쉬자. 다행히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았는지 예전보다 회피하고 싶은 기분에 함몰되는 시간과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시간의 간격이 꽤 많이 줄었다. 대신 현실을 버리고 다른 차원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 미술관을 찾기 시작했다.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더라도 어떤 공간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나 내가 그 시간에 머무는 순간이 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감각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에 비유하곤 하는데, 미술관도 일종의 토끼굴이었다.     




비루한 현실이 표백된 달콤한 이상 세계. 나는 미술관에서 이걸 찾고 싶었다. <산>을 처음 봤을 때처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갈망했다. 그렇게 정신을 잠시 딴 곳으로 빼놓고 싶었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마주한 세계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판타지가 아니었다. 내가 사는 현실과 비슷한, 어쩌면 더 적나라하고 절망적인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이때만 해도 작가나 음악가에게는 투사하지 않는 이상한 열등감을 유독 화가들에게 덮어씌우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더 뒤틀리게 표현하면 현실적인 고민을 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그림만 그려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건 무지에서 비롯된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온실 속 화초는 미술관 밖의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만난 화가들은 모두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2022년 8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유영국 20주기 기념전>을 관람하고 정영주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학고재 갤러리에 들렀다. 너무 더워 광역버스가 서는 광화문역까지 못 걷겠다 싶어 잠깐 에어컨 바람이나 쐬려고 들어갔는데, 문을 열자마자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에 시선을 빼앗겼다. 작품명은 <Another World>. 산동네의 가로등 불빛과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의 불빛이 어우러져 있는 그림이었다.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니 집은 모두 한지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와 이걸 어느 세월에’라는 탄식과 함께 다른 작품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각 작품이 묘사하는 산과 집, 불빛의 풍경은 비슷했다. 손에 쥔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를 기꺼이 받아줄 곳은 어디일까. 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지치고 힘들 때 돌아가면 언제든 문 열고 반겨주는 고향집 같은 편안함을 얻게 하고 싶다.” 전시실을 돌다 끄트머리에서 한 마을의 계절별 풍경을 묘사한 <사계> 시리즈와 마주했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이 뺨을 타고 마스크를 적셨다. 그림이 주는 무언의 위로와 포근함, 이 느낌의 질감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순간 오히려 언어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 RM이 미치지 않기 위해 미술관을 찾고 그림을 보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갤러리를 한 바퀴 더 돌았고, 태어나 처음으로 도록을 구매했다.




정영주, <Another World>, 2022 / 이미지 출처: 아키비스트




헤테로토피아. “철학자 푸코의 발명품인 이 단어는 실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동시에 사회 안에서 현실적 유토피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윤혜정, <인생, 예술>, p.332) 이제 미술관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되었다. 우선 현실과 단절되지 않고 현실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미술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몸을 이끌고 들어가는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다. 거기서 만나는 세계는 책에서 만나는 세계와 약간 결이 다르다. 책이 재료를 엄선해 먹기 좋게 다듬은 정갈한 한상차림이라면 그림은 식재료 그대로 밥상에 턱 올려놓은 느낌이다. 직관적이고 비언어적인 매체를 분석하려는 마음을 버리자 그림이 수수께끼처럼 보이지 않는다. 언어가 줄 수 없는 날것의 생생한 자극이 쏟아질 때 절로 입이 벌어지고 탄식이 새어 나오는 순간이 좋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그리울 때 미술관에 간다. 그리고 이렇게 화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났지만 당신의 심연을, 정수를, 어둠을 알고 싶다고. 앞서간 누군가의 한마디가 절실할 때, 삶과 정면으로 부딪칠 용기가 필요할 때, 도망치고 싶지만 살고 싶을 때 미술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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