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인생에서 시를 만나게 된다

by 이애리

사진: Unsplash의 Sarah Mae



처음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이 또 있을까. 처음 러시아라는 낯선 나라로 떠나던 스물하나의 인천공항. 만난 지 사흘 된 남자애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붙잡은 그 애의 셔츠 옆자락이 다 젖도록 땀을 흘리던 스물셋의 일본 나고야. 밤 9시 보고 싶다며 무작정 나타난 썸남의 얼굴을 마주하고 뺨을 붉히던 스물넷의 여의도역 투썸 플레이스. 1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에 가면 그 순간의 기억과 느낌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어떤 노래나 영화, 책과 처음 만난 순간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추천으로 미루고 미뤄왔던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읽었을 때의 전율, 그중에서도 단번에 날 사로잡은 <최후의 라이오니>. 습기가 방안에 눌어붙어 있던 장마철 어느 여름밤, 《중경삼림》, 그리고 영화 속 홍콩이 어딘가 모르게 나와 겹쳐 보였던 센치함. 친구와 《헤어질 결심》을 보고 퉁퉁 부은 얼굴로 여운을 나누며 걸었던 초저녁 밤거리.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을 때 신기하리만치 옛 감정에 젖어들게 만드는 노래들, 이를테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김윤아의 <going home>,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 모든 처음이 고유하게 소중하지만 나의 의미 세계를 한층 깊게 만들어 준 특별한 처음이 있다. 이혼 후 8평 원룸으로 이사한 이듬해, 책장에서 시집을 꺼내 읽었던 순간이다.




문학,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었으나 시는 늘 어렵게 느껴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주입식 교육의 여파였으리라. 수험생에게 시를 음미할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심상을 찾고, 시어의 의미를 외우고, 작가의 배경을 숙지하기에 바빴으니까.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SNS를 휩쓸 때도 좀처럼 유행에 올라타지 못했다. 낭만적인 제목에 끌리긴 했으나 몇 페이지를 들춰보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때로는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법. 한국 문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자기는 요새 시집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뜬금없이 나에게 시집 두 권을 선물했다. 하나는 유희경 시인의 《오늘 아침 단어》였고, 다른 하나는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였다.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니 고이 책장에 모셔두긴 했는데 도무지 펼쳐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는 했으나 감상은 그대로였다.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그렇게 두 시집은 붙박이처럼 책장에 꽂혀 한참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슨 계기로 시집을 펼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책장 속에 화석처럼 굳어있는 시집을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니 시인의 시집을 먼저 꺼냈고, 그렇게 시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로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샤워젤과 소다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우화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등 여러 시집과 조우했다. 어떤 만남에서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하고, 어떤 만남에서는 내면의 상처가 건드려져 인쇄된 글자 위에 눈물 자국을 남기기도 했으며, 어떤 만남에서는 다시 나아갈 힘, 다시 사랑할 힘의 씨앗을 발견하기도 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다른, 확실히 시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시를 접한 지 5년 차, 내가 내린 결론은 시와 미술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정제 과정을 거친 산물이 아닌 날 것 그 자체로 시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시 문학 형식에서 비롯된 리듬이나 운율도 분명 작용하겠지만 평론가가 아니니까 문학적 장치나 기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시를 읽을 땐 머리보다 늘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논리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 혹은 느낌의 본질에 더 충실히 다가가는 측면이 있다. 논리와 이성,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그저 느껴야 한다. 그림을 앞에 두고 사조가 어떻고 기법이 어떻고 분석하는 대신 작품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듯이, 지면에 펼쳐진 단어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우리는 평소 논리와 이성, 합리성의 통제 아래 일상을 살아가기에 이 틀을 내려놓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또한 언어를 매개로 글을 쓰는 작업 자체가 논리적 사고를 요하므로 제아무리 감성적인 소설이든 에세이든 논리성을 완전히 버리긴 어렵다. 그래서 내린 두 번째 결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듯, 우리에겐 시를 만날 수밖에 없는 어떤 시기가 있다.




어떤 시기란 바로 논리가 무너진 시기다. 믿었던 원칙, 신념 혹은 상대에 대한 신뢰, 깨지리라고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가치 등 나와 세상, 미래를 바라보는 기존의 인지적 틀이 부서지는 시기 말이다. 외상 경험이든 종교 체험이든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내리 꽂힌 통찰이든 상관없다. 자아가 가장 취약한 시기, 방어가 흐릿해진 시기, 그래서 역설적으로 수용력이 높아진 시기. 외부 자극을 온전히 '나'라는 존재로, 영혼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기. 바로 그때가 시와 만나기에 최적의 순간이 아닐까. 인간중심상담 강의에서 상담자가 감수성을 기르려면 시를 읽어야 한다던 교수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 것 같다.


한계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로 자꾸만 이곳저곳이 아팠던 날들, 정신분석 상담에서 꼭꼭 숨겨둔 그림자를 마주할 때마다 우울하고 공허감에 젖었던 날들, 다른 어떤 글보다 시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해 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 한 구절을 읽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며 잠을 청하던 날도 있었다.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작년 겨울, 대학원 동기 선생님들과 니콜라스 마짜Nicholas Mazza의 《시치료 이론과 실제》 스터디를 했다.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퇴사 후 빠르게 몸과 마음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만난 선생님과 소중한 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만날 때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말씀해 주신다. 긴긴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한마디였다. 시는 귀인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