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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자의 옷장 Aug 31. 2022

옷의 본질

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아주 원초적인 질문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려합니다.


패션이란?


여러분들은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수많은 답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이 질문에 수많은 답이 나왔던 것 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짓는 답은 없습니다.


이것을 답 내는 순간 아마 머릿속이 정지되고 패션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좁아질 겁니다.


패션은 마치 철학같습니다.


각자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거장이라는 사람들이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죠.


하지만 철학의 본질은 인간 본연인 것 같이 패션의 본질은 옷 본연입니다.


따라서 이를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놔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여러 디자이너들은 자유롭게 디자인을 하며 옷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원초적인 질문이 시작됐으니 또 하나 원초적인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옷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저는 옷의 시작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고 싶습니다.(기독교신자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이브는 누드로 다녔습니다.


Adam and Eve - Rembrandt van Rijn, 출처: commons.wikimedia.org


창피함도 모른 채 말이죠.


하지만 선악과를 먹었을 때 우리 아담과 이브는 창피함을 알아 나뭇잎으로 몸을 가립니다.


이것이 옷 즉 의복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무언가로 몸을 가린 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기능과 같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옷의 역사와 옷의 기능은 미학적인 면과 지역색을 띄며 수세기동안 발전하고 태어나고 죽으며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나폴레옹, 출처: en.wikipedia.org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 저희는 21세기 한순간의 역사에 휘말려있습니다.


정말 이 순간까지 수많은 옷들이 디자인되었습니다.


그중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죽어 가는 것도, 태어나는 것도 많습니다.


럼 이제 이 수많은 디자인을 입는 사람인 저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저는 다양성의 존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싫어해! 그래도 인정할게 그게 너라는 본질에 가장 가까우니까!’ 라는 생각이 기반이 된다면 개인이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옷의 범주가 더욱이 넓어지고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는 개인의 색이 무척이나 중시되는 사회이기도 하니까요.


좋습니다.


이제 옷이 태어나서 21세기로 오고 다양성의 문제까지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옷의 가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옷이란 ‘몸을 가리는 것’일테고 다른 사람들에겐 ‘내 부를 자랑하는 것’이 될 수 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겐 ‘나를 나타내는 것’ 등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옷의 가치는 모두 다릅니다.


따라서 표현법도 다르겠죠.


몸을 가리는 정도로 옷을 이해하는 사람은 옷의 색과 미학적인 부분은 무시한 채 기능쪽에만 입각하여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를 자랑하기 위해 입는 사람들은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브랜드를 입을 것이고 나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삶을 표현하는 방식을 옷으로 표출하며 입을 것입니다.


모두 좋습니다.


옷은 위에 말처럼 자유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위해 나오니깐요.


그럼 여기서 하나 질문을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옷을 잘 입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는 “옷을 잘 입었다!”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만큼은 제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옷을 잘 입은 사람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머릿속을 잘 이해하며 천박하지 않고 고고하고 거룩한 사랑으로 가득찬 철학을 옷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순간적인 쾌락을 좋아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아닌 척하고 쾌락의 사회에 닿으면 빠져 나오지 못할까 증오하고 살았지만 내심 마음으로는 그를 흠모했습니다.


그건 20대 초반의 청춘이라면 호르몬의 문제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설계가 되었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것까지 거스르며 잘못됐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20대 초반과 다릅니다.


이제는 사랑의 소중함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강렬히 간구합니다.


사랑은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것 없이 태어난 생명인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랑이라는 것을 손에 쥐게 되면 생명을 창조해냅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세상에 나를 증명해줄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랑이고, 그 존재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하는 이성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동과 감정은 그 어떤 것보다 숭고하고 고결하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목숨을 거는 것이 옳다고도 생각합니다.


너무 낭만으로 가득찬 꿈같은 이야기인가요?


저는 이 꿈을 놓쳐 깨버려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어느 시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낭만과 꿨었던 꿈을 아직도 간구합니다.


이 낭만과 꿈이 그냥 헛소리일까요?


아닙니다.


‘돈이 많다.’,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은 사실 별거 없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 말은 돈과 명예는 포기하고 사랑만 해라! 라는 글 또한 아닙니다.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책임이라는 것을 사람은 지게 됩니다.


그 책임을 위해 돈을 벌고 명예를 위해 달리는 것은 또 아주 당연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배경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기에 사랑에는 합리화가 없어야 합니다.



La Baiser(The Kiss) - Carlos Duran, 출처: telerama


옷을 얘기하는데 사랑까지 왔습니다.


제가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 열변을 기반으로 옷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옷의 가치가 될 것입니다.


저는 사랑은 쾌락적이지 않으며 고결하며 숭고하다 했습니다.


이를 옷에 표현해야합니다.


옷을 입는다는 행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외관입니다.


내가 옷을 쾌락적이게 입는다면 가벼운 사람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나는 아닌데!”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글쎄요, 진심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옷을 사랑, 그 안에 존재하는 책임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입는다면 정말 고결하고 숭고하게 입을겁니다. 


‘아 성직자처럼 입으라는 말이구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 몸을 잘 이해하고 내 몸에 맞게, 내 상황에 맞게, 내가 추구하는 철학을 잘 표현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 어떤 누가 봐도 ‘저사람 참 옷을 잘입는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게 제가 말하고 싶던 옷을 잘입는 사람입니다.





물론 저도 이것을 체화하기 위해 정말 많은 책을 읽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옷한테 지는 사람은 자신을 이해 못한 사람입니다.


옷이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인 사람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 모두 옷에 지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감사합니다.


26FEB2020




31AUG2022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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