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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자의 옷장 Oct 22. 2023

어느 늙은 테일러의 구원(9)

소설의 제9장

친구는 관에 갇힌 채 땅으로 묻힐 준비를 마쳤다. 수많은 울음과 기도 그리고 찬송 속에서 친구는 그렇게 사라졌다. 장례가 끝난 후 나는 친구의 아들에게 조심히 다가가 말을 건넸다.

  “런던에는 언제까지 있나?”

  “한 일주일 정도는 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쪽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여기 내 주소일세. 무슨 일이 있다면 여기로 찾아오게나.”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그럼 다음에 보지.”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 자네도 잘 추스르고.”

나는 몸을 틀어 청년에게 향했다.

  “다시 한 번 고맙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자네만 괜찮다면 이번 일요일에 이야기를 좀 나누지.”

나는 친구의 유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네 그럼 댁으로 제가 찾아가면 될까요?

  “아니. 내가 예배가 끝날 즈음 교회로 오지. 자네를 또 집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염치없는 일이야. 그럼 그때 보지.”

  “네 선생님. 그럼 그날 뵙는 것으로 하고, 조심히 들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 다시 한 번 정말 고맙네.”

나는 떠나던 발을 멈추고 다시 청년을 불러 세웠다.

  “못 전한 말이 있는데 친구가 정말 고맙다고 그러더만. 꼭 전해달라고 하여 이렇게 전하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무언가 전부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네킹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미완성된 아름다운 수트는 나에게 책망이라도 하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수트 앞에 앉았다. 이제 이 옷은 주인을 잃은 옷이다. 주인을 잃은 옷은 그저 천쪼가리에 불과할 뿐이다. 친구가 죽으며 이 옷도 죽은 옷이 되었다. 이제야 나는 친구의 죽음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참아온 것이었을까. 어느샌가 눈물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은 고통이 되어 천천히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또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친구가 나에게 교회에 가자고 하여 간 것도, 내가 옷을 지어준다 했던 것도 모두 후회가 되었다. 나는 내 감정에 너무 교만했다. 오랜만에 본 친구의 웃음은 좋았고 옛날이야기 또한 좋았다. 친구는 나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옛날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내 치부를 드러내도 괜찮은 그런 유일한 존재였다. 아주 오랜만에 본 것이었지만 당장에 어제 본 것 같았고 어쩔 땐 부모보다 더 부모 같았으며 스승일 때도 많았다. 나는 그 감정에 취했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 감정을 잔인하리만치 난도질하며 찢어버렸고, 이제 나에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편지와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숫자들뿐이었다. 옷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하여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만들던 옷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친구가 부탁했을 때, 그날에 내가 바로 시작했다면 친구는 이 미완성된 옷을 걸쳐 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친구의 죽음은 조금 더 미련 없었을 것 같다는 내 중심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마치 친구의 죽음이 내 죄인 것 마냥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죽음의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여태 죽음만을 원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 뻔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죽은 후에, 관에 묻혔을 때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에만 집중하던 어릴 때에는 보이지 않았고, 이제와 죽을 때가 되니 눈에 보였다. 친구의 유언은 그것을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할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오늘 내가 감정이 휘몰아쳐 청년과 잡은 그 약속은 그 의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끝없는 고통에 대한 해석과 유언에 대한 해석 그리고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에 오늘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었다. 삶의 괴리와 죽음의 괴리 그리고 감정의 괴리가 나를 끝없이 파고들었다. 나는 이 감정을 토로할, 이 상황을 벗어날 존재를 찾아야만 했고, 항상 그랬듯 신에게 나의 고통을 토해내었다.

  “제발! 부디 제발! 저를 그냥 가만히 두어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저는 이미 충분히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만을 마주해야 합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마주한 것은 다 허상이자 신기루였습니까? 이미 그리 오랜 고통에 저를 던져두고서도 다시금 저를 고통에 내모시는 것입니까! 왜 항상 저를 그런 곳에만 이끄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저는 왜 또 친구의 옷을 지은 것입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도! 도대체 왜! 부디 저를 조금만이라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말 제 인생에 주어진 고통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 무너져 내릴 힘도 없는 늙은이입니다.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린 날에 부모에게 죄를 지어서 입니까? 아니면 어린 날에 남에게 거짓을 말해서 입니까? 부디... 제발 부디! 응답해주시옵소서... 울며 수 없는 날을 기도 했지만 저는 여태 그 어떤 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저는 듣지 못하였고 원하는 것이 손에 잡힌 적도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 옷을 지으며 본 그것이! 그 아름다움이! 저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자 다 뜻이 있는 무엇의 구원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제 감사와 새로운 감정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감사로 만들어지던 그것은 그저 주인 잃은 천쪼가리로만 남았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까? 저는 이것을 제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친구는 그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저는 완성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 그것을 왜 도대체 제 손에 쥐어주신 겁니까! 이제는 제발 부디 제발 답을 들려주시옵소서! 저는 더 이상 고통 받기 싫습니다. 이제는 정말 괴로워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제가 아닌 제 친구를 먼저 데려가셨는지 설명이라도 해주시옵소서. 분명 괴로운 건 저인데! 도대체 왜!”

나는 쓰러졌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도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상기되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쏟아 부은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일요일이 오기까지 나의 모든 날은 그렇게 존재했다. 잠에서 깨면 신에게 구하고, 그러다 지치면 잠이 드는 그런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나는 나를 끝없이 갉아먹었으며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가온 일요일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려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교회로 향했다. 청년과의 약속은 지켜야만 했다. 청년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환한 미소로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낄 공간은 그 어떤 곳에도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분명 크리스마스에 이곳에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는 신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오로지 친구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오는 것이 꺼려졌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향했을 뿐이었다. 청년은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식사는 하셨나요?”

  “입맛이 없어서 식사는 걸렀네. 자네는 식사는 했는가?”

  “네 방금 먹은 참입니다. 그럼 들어가시죠.”

  “그러지.”

청년은 나를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조금 시끄럽지만 이곳밖에 이야기를 나눌 곳이 없는데 괜찮으실지요?”

  “물론이네.”

나는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많던 사람 중 표정이 가장 안 좋은 사람은 나였다. 살아가는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보였다. 그들의 고통이 나보다 가볍다면, 그건 너무나도 부러운 것이었다. 청년은 나를 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 괜찮고 말고. 너무나도 괜찮아서 곤란할 지경일세.”

누가 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교회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죄책감이 들어 어색한 침묵 후에 나는 입을 뗐다.

  “사실 괜찮지만은 않군. 버티기가 쉬운 일이 아니야.”

  “친구분의 죽음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것도 잘 모르겠네. 처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 내 문제야. 내 인생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순간마저 왜 이리도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네.”

청년은 깊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저는 선생님만큼 오래 살지도 못했고 선생님만큼의 지혜와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그냥 보고 있자니 저는 주제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먼저,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얼떨떨했지만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럼 부디 해주게나.”

  “선생님께서는 항상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고통은 사랑과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에만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고통의 크기는 개인이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이 남에게는 클 수 있으며 나에게는 큰 것이 남에게는 작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은 그렇게 악마와도 같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으로 하나로 통하며 그것은 거대하고 우리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죠. 하지만 고통은 말씀드렸듯 그 차이가 존재합니다. 고통이 거대하고 절대적으로 가늠할 수 없다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역설적으로 악마의 속삭임과도 다름없습니다. 작은 고통으로도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고 종류 또한 다양하니 이 얼마나 악마들에게 재밌고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과 같이 가늠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으며, 물론 그 이겨냄 또한 도와주심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름도 출신도 모릅니다.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가 저를 낳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 고통을 선생님께서는 아십니까? 아마 이해한다 하시더라고 저만큼은 아시지 못할 겁니다. 제 출생은 고통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왜 저한테만 이런 고통이 주어지나 많이 울며 기도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바뀌는 것이 없는 그 절망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 또한 선생님처럼 절망을 뿌리치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절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 태생인데 그것을 어찌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죽음으로 저를 부르는 그 달콤하게 들리던 악마의 속삭임은 사라지고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아주 역설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정말로 그랬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셨죠. 고통 속에 어찌 그리 감사하냐고. 저는 그 절망과 고통을 회피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하며 부수어져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절망과 고통은 그냥 그대로 존재하기에 그 존재를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여 저와 분리해내는 순간 제 삶은 다르게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나고나니 감당하고 말고의 문제 또한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삶에 집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저 회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회피를 통하여 깨달으신 직업철학과 옷에 대한 철학 그리고 그 마음가짐을 비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가지지 못한 그 깊고 위대한 생각과 마음가짐을 저는 존경하고 그것이 너무나도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님이 옳은 일을 행하신 것이냐는 의문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삶을 사셨습니까? 삶은 저희에게 함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이유가 있고 이유가 있으면 저희는 묵묵히 행해야합니다. 선생님이 행하신 일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까?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이유 말입니다. 선생님께 감정과 사랑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이 주는 고통을 탐닉하시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고통을 이겨내려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회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회피는 이겨냄이 아닙니다. 이겨냄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섰을 때만이 감사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때만이 우리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런던에 널린 기름때를 뒤집어쓰고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잠을 자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십시오. 저 거리에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고통이 없겠습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힘들어 보이지만 그들이 살아내는 모습은 너무나도 숭고합니다. 그에 비해 선생님은 너무나도 교만하여 보이십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셨으면서 분노하시고, 주변을 돌아보기는커녕 자신에게 화만 내며 그렇게 많이 주셨음에도 신에게 탓만 하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아무리 예의를 차리고 신사라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원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그렇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교만한데 이보다 웃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발 분노하지 마시고 제대로 마주해야합니다.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닌 그 달콤한 속삭임을 떨쳐 내야만 합니다. 회개하고 엎드려 삶을 구해야만 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도 죽음을 노래하셨지만 또 새로운 고통이 와 고통스러운 것은 아마 선생님의 교만과 회개의 부재 그리고 삶의 부정이지 않나 싶습니다. 다 이야기해놓고 웃긴 말이지만, 이렇게 말씀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중간에 화가 났지만 냉정하게 들었을 때 청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나는 나에게 분노하는 것이 맞았으며, 신에게 화만 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제일 힘든 인간이라 생각했으며 남들은 힘들어도 나처럼 고귀하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회개한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옷을 짓는 것과 그 관련된 모든 것에 진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회피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은 교만이자 어리숙함이었다. 심지어 교만하다고 생각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 생각자체가 오히려 교만이었으며, 그 자아도취는 나의 눈을 가리고 더욱이 교만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전부 고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조급해졌으며 나이를 떠나 청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되냔 말이야.”

청년은 미소를 띠며 답해주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포기가 아닌 자신의 죄를 다시금 알고 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그 죄들에 대해 조심하며 행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부모에게 용서를 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물론 회개로 이 세상에서의 죄는 남들에게서 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겠지만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용서해주실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용서를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나약한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약하기에 죄에서 빠져나와 이를 인정하여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에 놀아난 저희들 같은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아마 그 속삭임이 달았다면 회개는 쓴 약 같을 겁니다. 나의 죄를 피부에 새기는 데, 그것이 고통을 한 순간에 끝내줄 것만 같은 죽음보다 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절대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너져 내렸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울 듯 모든 것을 쏟아내며 울었다. 나의 모든 것은 거짓된 것 같았으며 내 인생은 죄 자체였다. 그 무엇도 나를 구할 수 없었다. 내가 기댈 곳도 없었다. 나는 내 위치에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은 노력이 아닌 분노의 표출이자 객기였다. 나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죄인이었다. 회개를 하는 것조차 너무도 무서웠다. 내가 했던 그 수많은 행동에 벌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마 이것이 내가 그토록 원한 구원의 빌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처음 흘려보는 듯한 이런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구원을 너무나도 받아드리고 싶었지만 나와는 너무 멀어보였다. 나는 그렇기에 내 죄를 마주 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나의 나약함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 이 글 등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22OCT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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