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평생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되며 자신과 가장 닮은 것을 꼽으라 한다면 무조건 반사로 옷장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옷장은 평생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에 따라 자신의 취향과 삶의 냄새가 깃들어 가는 공간이다.
이러한 연유로 옷장은 인간과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추가적으로, 옷을 구매하는 것에도 시행착오가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취향도 바뀌어 가고 지식도 늘어나게 되며 옷장은 점차 자신에 맞게 진화하게 된다.
이 또한 인간과 닮아있다.
나이가 들며 시행착오로 인해 성숙해지고 더욱 자신을 알아가며 바뀌어 간다는 것은 옷장뿐 아니라 인간도 그러하지 않은가?
인간이 성장하려면 사유가 필요하듯 옷장도 그러하다.
그러나 옷장은 혼자서 사유할 수 없는 무생물이기에 인간이 사유를 대신 해야 한다.
이는 고로 인간 사유의 결정체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일이지만 서양권에서는 익숙한 것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옷장을 물려주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을 개인적 견해로 해석하자면 옷장이란 자신을 지켜온 삶을 물려주는 것이라 판단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문화라 하더라도 여기엔 큰 전제조건이 붙어야 한다.
그것은 ‘옷의 가치와 모양은 세대가 지나도 불변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이것이 서양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그 모양과 가치가 사회문화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잡고 유지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해도 차이 정도로만 해석하기에는 남성복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변하는 옷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고가 필요한가?
결국 불변하다는 것은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문화적 이해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나’라고 이름 적힌 모래 한 톨을 찾는 것과 같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우며 어려운 일이다.
죽음에 다가가며 완성된 옷장이란 이러한 고통 속에 완성된 ‘나’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완성 시키고자 한다면 그 길에는 사유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 페이지 첫 문장이다.
이는 사유가 시작되는 욕망이라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앎은 도대체 무엇이고 이것은 어디서 시작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을 사유의 옷장으로 어떻게 구축시켜야만 하나?
'경험'이라는 단어를 꺼내와 단초로 설정하고자 한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동물의 한 종인 인간이기에 오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경험이라는 것을 오감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특히 옷은 그중 시각을 통해 처음으로 인식이 되고, 개인 경험의 시발점이 된다.
경험을 하고 싶건, 않건 눈에 어떠한 상(像)이 맺히는 순간 무(無)에서 유(有)로 머리에 인식이 된다.
그것을 인식했을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어떤 존재가 실존하건 말건 개인의 주체가 그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그것은 [없는 것]이다.-마치 양자역학과 같이-
인식을 한 뒤로 그것의 존재 유무가 드러나고 속성이 파악되기 때문에, 그다음에서야 존재의 존재에 의미가 생긴다.
시각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시각이 이 중 큰 틀 안에서의 속성 분류를 가장 완벽히 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무의 경험을 한 개체를 가정한다면 그 개체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경험으로 인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시각 없이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통하여 어떤 존재의 형상화를 시킬 수 있나?
이에 대해선 부정의 답변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은 직관적인 실체화와 형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각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옷의 경우에는 이 본질을 시각을 기반으로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각의 경험으로 인하여 인상과 기억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감각의 확장이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경험의 직접 개인화를 할 수 있다.
시각이라는 것만으로 한 경험은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며 [아는 것]이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고, 이때 [아는 것]은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기에 간접적 경험으로 인한 간접 개인화이다.
옷으로 따지면 시각을 넘어서 옷을 만져보며 원단을 느끼고 그다음은 입는 행위로 넘어가 옷이 몸에 입히는 느낌과 원단마다의 특성을 느껴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입력되어 쌓이게 된다면 이를 통한 학습이 진행된다.
학습이라는 것은 기술과 학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단어로 이야기한다면 [실전]이고 학문은 말 그대로 [학문]이다.
기술과 학문은 결과적으로 경험이 쌓여 나온 어떤 것이지만 색이 조금은 다르다.
똑같이, 이론에 따른 결과를 갖고 있지만 기술의 경우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이론과 결괏값이 발생이 되고, 학문은 삶에서 벗어난 여가의 형태를 띤 것에서 이론과 결괏값이 발생하게 된다.
비슷하지만 서로는 적대적인 관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옷으로 예를 들자면 세탁에 있어-지식의 대중화 이전의 사고 방향으로-, 기술자들은 '울(wool)을 세탁할 때 중성세제를 써야지 다른 세제를 쓰면 옷이 줄어든다.'(수단)라 말할테고 학문을 전공한 자들은 '울은 단백질이라 산과 염기에 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제를 사용했을 때는 단백질이 변성되어 옷이 줄어드는 것이다.'(이론)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이 예시에서 보이는 차이는, 같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중간값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스칼라 값은 다르고 벡터 값이 같다.'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면 같은 결과에 대해 기술자들은 '이거 해봤는데 원래 그래'이고, 학문을 전공한 자들은 '이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래'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더 나아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혜]로의 확장이다.
지혜는 3차원적인 것이다.
1차원은 경험, 2차원은 경험이 만들어 낸 기술 혹은 이론, 3차원은 기술의 집합 혹은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혜에 도달한 인간은 '지혜롭다'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절대적 지혜가 존재하는가?
절대적 지혜는 존재할지 몰라도 그것이 모든 문화와 인류에게서 통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절대적 도덕이나 선(善)은 존재하지만, 지식같은 경우는 변화할 수 있으며 절대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그렇기에 ‘학자들이 추구한 앎의 가치는 선한 지혜이며 그들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나, ‘기술이 뛰어나거나 다양하여 그로 인하여 많은 것을 전수할 수 있는, 실천을 통한 삶으로의 경험을 이룩한 기술자를 '지혜롭다'라고 하며 '그것이 선한 지혜이며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나?’ 라는 질문은 그 무엇이 먼저가 되기 어려우며 선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로 옷장을 바라보자면 옷장의 주인은 자신이다.
자신은 옷장에 있어서는 절대자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한해서는 자신의 옷장은 지혜로우며 선할 수 있다.
앞서 '경험', '기술', '학문', '지혜'에 관하여 옷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서술했다.
이것은 사유이자 옷장 구축에 시발점이 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옷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한 것이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똑같다.
자신의 경험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며 그것을 통하여 어떻게 기술을 익혔고 그것은 나의 학문-꼭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닌-에 어떻게 적히고 연구되어 표현이 되는가?라 해석할 수 있다.-이것은 인생에 있어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규율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렇기에 같은 사유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옷장과 자신은 합일이다.
아무리 자신이 사유 되었다고 하더라도 옷에 사유가 덜하기에 지혜가 부족하여 규율을 어긴다면 –조금은 강력한 말로-규율을 어긴, 이상해 보이는 사유 되지 않은 인간이 될 뿐이다.
이는 분명 같이 사유 되며 자신의 사유를 증명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삶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옷장이란 더욱이 강력하게 사유 되어야 한다.
사유 된 옷장을 물려받는 것이란, 이렇듯 그 사람의 사유와 삶을 물려받는 것이다.
물려받은 개인은 그것을 해석할 테고 그 존재는 그렇기에 더 짙고 깊게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순간으로 끊이지 않으며 영원으로 흘러간다.
불변하다는 것은 사실 그것이다.
그렇게 남자의 옷장은 사유와 삶 속에 존재한다.
'나'는 그 옷장의 문을 어떻게 닫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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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Annie Spratt
27FEB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