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스락거리는 여름 이불이 발에 걸립니다. 바깥이 벌써 희끄무레하게 밝아진 걸 보니 새벽인가 봅니다. 퍼뜩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발견하고 왠지 싸한 느낌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신랑이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듭니다.
저는 워낙 잘 잠들지도 못하는데다 잠귀가 밝고 예민한 편이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출근 준비를 하는 신랑이 툭탁거리는 소리를 내서 깨게 되면, 그리고 덩달아 아침잠 없는 아들까지 깨게 되면 짜증이 많이 났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거꾸로 이 소리 덕분에 새벽에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랑과 죽는 날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했습니다. 절대 그 마음 변치 말자고 둘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생각으로는, 만약 우리가 나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난 당신이 헤어지자고 해도 절대 이혼 안 해줄 거야,’ 라고요. 그런데 신랑더러 우리 헤어지자, 라고 실제로 말을 꺼냈던 사람은 다름아닌 저였습니다.
근 한 달을 검사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사람이 보이스피싱 사기범이었고, 제 이름으로 된 대포통장이 범죄에 쓰여 제가 피의자로 고발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던 제 행동은 모두 사기범의 배를 불리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내준 채무 부존재 확인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했고, 자산 상태가 깨끗하다는 걸 증빙하는 과정이라며 실행해보라고 했던 대출은 전부 제가 갚아야 할 3억의 채무가 되었습니다.
꿈에서도 믿기 싫은 이 상황을 경찰서에 신고하고 새벽 3시경 집에 돌아왔습니다. 먼저 잘 줄 알았는데 신랑이 집 바깥에서 서성이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신랑더러 우리 헤어지자, 그냥 나를 버려,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정말이지 저는 차분한 상태였습니다. 아주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신랑 자산이라도 지키려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장이 있어 파산신청도 어렵고, 개인회생이라도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신랑 자산을 채무 변제에 끌어들여야 하니 협의이혼을 해서 신랑 자산이라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사기당해서 채무를 떠안은 상황인데, 신랑이 같이 갚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건 그야말로 끔찍하게 싫은 일이었습니다.
신랑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도 채무를 감당할 길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신랑은 지인들을 수소문하여 변호사 몇 명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개인회생 절차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절차를 알면 알수록 제가 변제해야 할 금액이 저의 월급에 비해 너무 과하고, 협의이혼을 해야 그나마 개인회생에 유리하다는 현실에 근접하게 되자, 신랑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우리 그러면 일단 이혼을 하는 걸로 하자, 아들은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아무래도 좋을 테니까 친정에 둘이 들어가서 살아라, 주말이 되면 만나자, 다양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혼을 한 뒤 개인회생 신청을 하고 약 1년 간 지내다가 개인회생 결정이 나고 회생 개시를 하게 되면 제가 갚아나가는 걸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잠이 계속 모자랐기 때문에 우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새벽에 갑자기 조금 추워서 깼습니다. 다시 잠을 청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내년에 초등학생이 됩니다. 부모가 이혼한 상태일 것이므로 아들은 한부모 가정 출신이 됩니다. 요즘 이혼이 흔하여 흠도 아니라지만, 제 가족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등본에 신랑의 이름이 사라질 것입니다.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우리 진짜로 부부가 되었다고 좋아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유산을 반복해서 우울해 있던 제게, 자녀가 없어도 괜찮으니 우리 둘이서라도 재미있게 살면 된다고 위로해주던 신랑의 말도 생각났습니다. 신랑은 제가 힘들고 외로울 때 줄곧 곁을 지켜주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신랑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 거지요?
저도 모르게 흑흑 울기 시작했습니다. 숨죽여 울었는데도, 최근 같이 예민해져서 잠귀가 밝아진 신랑이 저 때문에 깼습니다. 울고 있는 저를 토닥토닥 달래는 손길이 느껴지자 더 서러워져서 그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나 버리라고 했던 거 취소할래. 나 당신 없이는 솔직히 잘 못 살 거 같아. 1년 정도 떨어져 있는 거라면 참고 버텨보겠는데, 3억이면 개인회생 하더라도 10년이 걸릴 거야. 여보, 나 10년 동안 당신 없이 못 살아. 뻔뻔해서 미안한데, 나 뻔뻔한 거 아는데, 이런 나라도 데리고 살아줄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습니다. 억울해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최근 강남의 잘 사는 집들에선 절세를 위해 위장 이혼이 유행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이 한부모 가정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잘 되어 있어서, 그 혜택을 보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혼하고 싶지 않은데, 아들과 셋이서 잘 살아보고 싶은데, 처음부터 사기 칠 심산으로 전문적으로 준비한 집단에 털려서 헤어져야만 하고, 반면에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는 일부러 헤어진 척 하고 있다니, 이보다 더한 악몽이 어디 있을까요.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우리 그냥 같이 살자.’
신랑이 나지막하게 답해주었습니다.
신랑은 어쩌다 운이 억세게 나빠서 저처럼 속기 쉬운 여자를 아내로 맞았나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합니다. 면목이 없지만, 진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