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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은 가짜였는데

그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by crux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살면서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 ‘~할 걸’이라고 하신 적 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며 후회해봤자, 현재가 나아지는 데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고 계시면서도 선생님 또한 자꾸 ‘~할 걸’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는 게 참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휴대전화를 평소처럼 무음으로 해둘 걸, 수사관을 사칭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침착하게 알겠다고 하고 끊을 걸, 내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을 것 같아도 정말인지 확인부터 할 걸... 할 걸, 할 걸, 사기당했을 당시를 떠올리기만 하면 후회할 일들만 한가득입니다. 짜증나고 골치가 아파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다보면 과거를 회상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탓에 그만 또 끝없는 자책의 수렁에 빠져들고 맙니다.


교만했던가 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일한 대가가 급여통장에 항상 당연히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절약하며 살았으니 앞으로 재산이 불면 불었지 절대 줄어들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야무지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인생이 그전까지는 조금씩이나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성 없이 시간을 함부로 쓰는 것 같은 남들을 답답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쓰면 얼마든지 많은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데, 왜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걸까, 하면서 그들의 느긋함을 질책했습니다. 기실 그들이 느린 게 아니라 제가 너무 조급했다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할 걸’이란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제가 그러고 있네요.’ 쓴 웃음을 지으며 학창 시절을 되새기다가 문득 그때 배웠던 모파상의 ‘목걸이’란 소설이 기억났습니다. 허영심 많은 말단 공무원의 아내가, 화려한 사교 모임에 가기 위해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렸다가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목걸이와 꼭 닮은 다른 목걸이를 겨우 구해서 친구에게 돌려주고, 그 뒤 소설 속 주인공은 목걸이 값을 벌기 위해 10년 간 억척스럽게 일만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그러고 보니 딱 10년입니다. 저도 아마 10년 간 주구장창 벌어야 3억을 갚을 수 있겠지요. 어린 시절 별 생각 없이 소설을 읽었을 때에는 10년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그 세월의 무게와 어려움을 익히 알 지금 나이에 와서 향후 변제기간으로 보낼 10년을 바라보니 너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납니다. 요즘 직장인들이 평균 10년을 벌어서 집을 산다는데, 그렇게 보면 저는 집 한 채를 그 자리에서 날린 겁니다. 괜히 친구에게서 목걸이 빌렸다가 10년 고생한, 소설 속 주인공도 그런 셈이지요.


주인공은 10년의 빚을 모두 청산한 어느 날, 거리에서 목걸이를 빌려줬던 친구를 우연히 만납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간의 일을 다소나마 후련한 마음으로 털어놓지요. 그런데 친구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잃어버린 목걸이가 사실 가짜 다이아몬드로 된 싼 것이었다는 허망하기 그지없는 진실입니다. 주입식 국어 교육을 받은 저는, 이 작품의 교훈이 허영심을 부리지 마라, 헛된 것에 집착하지 마라, 이런 것들이라고 배웠고 그동안에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헌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주인공이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면 어땠을까?’


친구가 목걸이 잃어버린 데 대해 주인공을 타박하긴 했겠지만, 목걸이가 가짜였다는 진실은 금방 밝혀졌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존심 탓에 혹은 겁이 난 탓에 친구에게 벌어진 사건을 바로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소설의 새로운 교훈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소통’이었던 것입니다. 실수를 했어도 그걸 깨끗하게 인정하고 즉시 공개해서 비난을 받든 책임을 지든 했어야 하는데, 제때 공개를 못해서 10년의 고생스러운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이제 와서 가장 뼈아프게 후회하는 부분도 다름아닌 ‘소통’입니다. 누군가 제게 네가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하면, 그리고 네 이름으로 고발이 들어왔다고 하면, 그 말에 아무리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어도 이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바로 털어놨어야 했습니다. 저는 쓸데없이 이 부분에서 입이 무거웠습니다. 사기범들이 제가 입만 뻥긋해도 신랑부터 부모님까지 전부 소환조사 당하게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 저는 두려워서 정말로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모든 불행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모파상의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그랬고, 저에게도 그랬습니다.


지금 알게 된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지만 저는 ‘~할 걸’이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다시금 결심합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대로만 살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데, 제가 이걸 실천을 못해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에서라도, 잊지 않고 소통에 신경을 쓰려고 합니다. 저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문제가 터져도 솔직하게 공유하고, 남들이 제 치부를 아는 것에 대해서 겁먹지 않겠습니다. 가장 어렵고 험한 길인 줄만 알았던 정면돌파가, 실은 가장 쉽고 빠른 길이란 걸 오늘에서야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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