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 때는 선과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을 재미있게 본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국가정보원의 잠입요원인 이수현은 임무 수행을 위해 거리의 깡패 케이로 살아가다가, 그만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눈을 뜬 그는 자신을 케이라고 부르며 아끼는 깡패조직의 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고, 케이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친했던 친구도, 어린 시절 그를 친아들처럼 키워주었던 친구의 아버지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도 알아보질 못합니다. 나중에 이수현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지만, 흔들려버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번민합니다.
검찰에서는 제 명의로 된 대포통장이 멋대로 개설되어 사기범죄에 쓰였다고 했습니다. 저더러 누명을 벗지 못하면 직장 유지에 곤란을 초래할 거라고 했습니다. 화들짝 놀라 검찰 조사에 응했습니다. 제가 사기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루빨리 증명해내고 싶어, 최대한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밤늦게 혹은 새벽까지도 제게 지시를 내리는 그분들도 야근하느라 고생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잠이 부족하지 않냐는 제 질문에, 담당 검사는 사법고시 준비할 때부터 습관이 되어 잠을 원래 별로 안 잔다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저는 검찰 수사관도, 저의 담당 검사도, 금융감독원 직원들도 모두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찰서에 먼저 피해 신고 접수를 한 다음,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 실의에 빠졌습니다. 제가 사기범들로 인해 잃어버린 돈은, 기존에 갖고 있던 돈도 아니고 순전히 제 이름으로 낸 대출금이었습니다. 사기범들은 제게 금융감독원 차장의 도장과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직인이 찍힌 ‘채무 부존재 확인서’라는 증빙서류를 주면서, 검찰 조사로 인한 신용등급 조회와 대출은 실제 채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물론 그러한 증빙서류는 전혀 법적 효력이 없었고, 채무는 고스란히 제 것이 되었습니다.
퇴근 이후에도 사기범들이 계속 제게 이동 경로를 보고하라고 하여, 쉬지도 못하고 30분 간격으로 어디서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하고 사진을 찍어 보냈었습니다. 요리하고 있다, 빨래 널고 있다, 빨래 개고 있다, 아들을 재우고 있다... 만약 제가 집안일을 하느라 간격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왜 이리 보고가 늦냐며 소환조사 받고 싶냐고, 당신만 소환조사가 아니라 당신 남편까지 소환조사 받을 거라고, 바로 협박 아닌 협박이 날아들어 왔습니다. 약간이라도 항변하려 하면 말을 가려서 하라는 둥, 이게 모두 다 녹취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둥,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그게 모두 거짓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습니다.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습니다. 실은 이게 저에게 벌어진 일이 맞는지, 아직까지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진실이 거짓말 같고, 거짓말이 진실 같습니다. 진실이 너무도 참혹한 탓에,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아서이겠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며 억지로 잤었는데 멀쩡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거꾸로 편안하게 잠들었는데 괴로워하며 일어나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느라 잠시 진실을 잊어버리고 살 땐 깔깔 웃기도 하는데, 어느 순간 진실을 깨닫고는 그만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오늘 점심 식사를 하다가 옆에 앉은 직장 동료가 아침에 보이스피싱 기사를 읽었다면서, 요즘 세상에는 이런 일도 다 있는 모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사의 주인공은 저입니다. 마침 제가 기자와 인터뷰하여 작성된 기사 이야기를 동료가 하며, 저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저라는 걸 굳이 밝혀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6개월 넘은 아이를 유산하여 유도분만으로 낳고, 병가 끝나고 직장에 복귀했던 때, 제가 유산했다는 걸 모르는 동료가 저에게 다가와 이제 배는 많이 나왔냐면서 저의 배를 만져봐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제가 유산했다는 걸 굳이 밝혀서 그 동료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이가 없는 배를, 동료는 신기해하면서 만졌습니다.
동료들은 몰라서 제게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진실을 모두 알면서도 저를 구슬러 보기도 하고 겁박해 보기도 하는, 그런 사기범들이 훨씬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기범들이 어느 다른 곳에서는 스스로를 선량하고, 친절하고, 심지어 희생적이라고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선하고, 어떤 사람이 악한지를, 판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진실을 이야기해도 꼭 거짓말 같습니다. 그리고 저라는 사람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으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저와, 억울한 사정을 기자에게 인터뷰했던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저라는 한 사람 안에서 여럿이 싸웁니다.
어쨌든 천만다행입니다. 저는 직장을 잃지 않았고, 총책은 잡지 못했지만 전달책은 세 명이나 잡았습니다. 제 사연은 기사로도 몇 번 나갔고, 제겐 저를 염려해주는 동료들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 사실을 증명조차 해내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돌이켜보면, 착실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은 경우가 무수히 많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에는 멀쩡한 사람들이 사상 검증 운운하며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들은 단지 그 혈통 탓에 가스실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그나마 저는 다행인 것입니다.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 개와 늑대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햇살이 강렬한 대낮에는 확연히 보였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에는 멀리서 오는 사물이 나를 위한 충성스런 개인지 죽이러 다가오는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개였던 나는 늑대가 되고 늑대였던 나는 개가 됩니다.
나는 그런 일 절대로 안 당한다, 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기사 댓글은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도 제발 그분들이 절대로 안 당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기 힘든, 그런 시간이 분명 언젠가는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런 때 필요한 건 ‘나한테는 절대로 그런 시간이 올 리 없어’, 라는 호기로운 짐작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시간을 슬기롭게 빠져나올 것인가’, 라는 진지한 성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