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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한 걸음만 물러나면

by crux

다녀왔어? 라고 웃으며 반기는 제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 하고 신랑이 현관으로 들어섭니다.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아닌 척하고 옷방으로 따라 들어가 오늘은 뭐 했어?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신랑은 피곤한 표정으로 별 일 없었어, 라고 대화를 끊습니다.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신랑에겐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가라앉은 눈매가 있습니다.


다수의 남성들은 우울하면 동굴에 들어간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이 답답해서 동굴 밖으로 끌어낸다고들 합니다. 그러면 서로 스트레스가 높아져 있는 상태인 탓에 필연적으로 다툼이 벌어집니다. 저도 압니다. 이럴 땐 신랑을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썩 마음에 차진 않지만, 일단 그냥 넘어갑니다.


옷방에 놓인 커다란 봉투를 가리키며 신랑이 이게 뭐야? 하고 물어봅니다. 아 엄마가, 내 옷이래, 라고 제가 답을 하자마자 신랑이 아 이런 것 좀 주지 마시라 그래. 있는 것도 버려야 할 판에 무슨 옷이야, 라고 합니다. 이건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 문장입니다. 친정 어머니는 물건을 쌓아두고 사시는 데다 이것저것 뭘 많이 주시는 편이라, 친정 어머니에게서 물건이 오면 저도 감사 표시보다는 으레 잔소리를 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따라 ‘있는 것도 버려야 할 판에’ 라는 부분이 너무도 듣기가 싫습니다. 있는 집도 날릴 위기에 처한, 제 자격지심 때문입니다.


그러다 신랑이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라고 합니다. 저와 결혼한 이후로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던 사람이 근래엔 걸핏하면 저럽니다. 피우지 말라고 했더니, 네가 나라면 안 피우겠냐, 라는 답이 돌아왔었습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담배 아니라 뭐라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신랑은 외투를 챙겨입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속상해서 미칠 노릇입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라며 신랑이 저를 힐난하는 것만 같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이럴 땐 그냥 거실 창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합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데, 그걸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공연히 딴 곳을 바라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열심히 버텼습니다. 억지로 버티느라 힘들었나 봅니다. 서로가 가장 소중하다고, 우리 같이 이겨내 보자고, 다독이고 북돋우던 초반의 마음은 일상의 칼날에 많이 닳았습니다. 매달 날아오는 이자 금리 문자에 철렁하고, 날짜에 맞춰 이자를 내고, 카드값 줄여보겠다며 연거푸 집에서 식사를 하는 통에 집밥이 입에 물리고, 키가 껑충 자란 아들에게 발목이 다 드러나도록 짧아진 예전 옷을 그냥 입히다보면 ‘다 잘 될 거야’ 같은 말 따위는 공기보다도 더 가벼워져 아스라이 흩어져 버립니다.


할머니 댁으로 이사 갈 지도 모른다고, 아들에게 먼저 알려준 사람이 다름 아닌 저이면서, 막상 할머니 댁으로 간다고 좋아하는 아들에게 저는 꽥 소리치며 야단을 쳤습니다. 죄 없는 아들을 괜히 들들 볶았습니다. 이사 갈 지도 모른댔지, 언제 이사 간다고 했냐고. 너는 우리 집이 그렇게 싫고, 할머니 댁이 그렇게 좋으냐고. 그러자 잔뜩 화가 난 제 눈치를 보면서 아들이 ‘아냐 엄마, 나 우리 집 좋아,’ 하고 저를 달랩니다. 거짓말, 하면서 저는 또 아이같이 울음을 터뜨립니다. 어른답지 못한 엄마 탓에 아들만 눈치 백단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경조사비 나가는 것도 솔직히 아쉬워졌습니다. 제 경조사 안 챙겨준 사람에게도 경조사비 시원스레 내주고, 면식만 있고 아주 친밀하진 않았던 사람의 경조사도 웬만하면 직접 가주던 호방한 저는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제 경조사를 챙겨준 사람 몫은 할 수 없이 내긴 내는데,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참 이렇게 계산적으로 살기는 싫었는데, 제 코가 석 자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봅니다. 5만원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어려워하며 봉투에 넣는 저를 보고 신랑이 말합니다. 5만원 옮기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섭냐, 몇 천 만원씩 옮긴 애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비아냥거립니다. 심술궂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맞는 말인지라 딱히 대꾸하기도 애매했습니다. 그렇지? 하고 웃어넘겼지만 속이 점점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아무리 보이스피싱 당한 게 저라지만, 제가 누군가를 해코지한 것도 아니고,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안 당했을 거라는 식으로 오만하게 구는 신랑의 태도에 울화통이 치밉니다. 하지만 또 참습니다. 신랑도 저를 참아주고 있을 테니까요.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지만, 어쨌든 참습니다.


식사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초등학생이 될 아들의 책가방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고가 브랜드의 아주 좋은 제품이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진 지금이 아니라, 사정이 좋았을 때조차 선뜻 사지 못했을 물건을 얻게 되어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러웠습니다. 정말 아껴서 잘 쓰겠다고 몇 번씩 감사 표시를 하고 책가방을 집에 가져왔습니다. 에고, 이거 받을 줄 모르고 괜히 벌써 책가방을 사버렸네, 라는 저의 말에 신랑이 또 쏘아붙입니다. 넌 좀 살 거면 제대로 된 걸 사, 쓰레기 될 거 사지 말고. 장모님이랑 똑같애. 한 번 살 거면 후회 없을 물건을 사야지, 맨날 그렇게 싼 것만 사냐? 그 순간, 저는 폭발해 버렸습니다.


야 너는 애꺼 싼 거라도 샀냐? 가방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주제에!!!


커다란 제 실수를 신랑이 같이 감당하고 있다는 걸 저는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아닙니다.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배려할 필요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신랑은 천성이 선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말을 툭 내뱉어놓고 본인만 그 말을 잊어버리는 다소 고약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거의 2시간을 싸웠습니다. 신랑이 사과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싸웠습니다. 화해했습니다. 최근엔 아주 크게 싸웠습니다. 또 화해했습니다. 이제는 화해하기 지겨워서 안 싸울 판입니다.


싸움의 원인은 늘 비슷합니다만, 요즘 들어서는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는데, 네가 나한테 이래?’ 라는 기조가 깔려 있으니 싸움이 더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 즉, 서로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각자가 충분히 무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도 과도하게 저를 생각해주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자꾸 빈정거리고, 저도 직장에 육아에 살림까지 도맡고 있다가 신랑이 괘씸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하지 말아야 싸움도 덜 벌어지고, 큰일도 덜 치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제가 만약 보이스피싱 초반부터 자초지종을 신랑에게 털어놓았으면 피해가 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랑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답시고 저는 침묵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무리한’ 것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진실이 보이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신랑이 하는 말들 말고, 실은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 그걸 바라보면 훨씬 제가 부드러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기범들은 사기 행각이 들통나기 직전까지는 저에게 결코 못되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를 최대한 잘 구슬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게 진실로 관심 있고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말은 웬일인지 참 듣기가 거북합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제 뒤통수를 치려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귀에 착 붙게 말을 했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더니, 과연 그런 모양입니다.


말을 믿을 게 아니라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또다시 이게 되지 않아 화가 날 때가 있겠지만, 애써 떠올리겠습니다. 투박하고 불쾌한 말들 뒤에 가려진, 성실하고 선량한 신랑의 본모습을요. 저를 위해 요령 없이 무리하고 있는, 단 하나뿐인 남자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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