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얼마 전 SNS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친구의 모교에서 기간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같은 재단 소속 대학 교수도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을 듯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내막이 있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사립학교에 정교사로 임용되기란 아직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잣대로 임용을 하는 재단도 있지만, 소수 몇 사람의 입김으로 내정자를 선발하는 재단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런 탓에, 정교사로 임용되고 싶었던 그 기간제 교사는 당시 행정처장이었던 교수에게 2억 원을 건네 재단 측에 전달했고, 그럼에도 몇 년 간 임용이 되지 않자 2억 원을 돌려달라고 교수에게 요구했나 봅니다. 하지만 재단 측이 학교발전기금으로 받은 5천만 원 외의 1억 5천만 원은 모르는 일이며, 교수에게 이 일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자 기간제 교사도, 교수도 망연하여 그만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비슷하게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했는데, 울분과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진을 한 경우들도 들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선망하는 S전자에 다니던 사람이 닷새 동안 5억을 잃어 그리 된 경우도 있었고, 법정 경제단체에 소속된 유능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5억을 잃어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어떠한 경로로 그렇게 되었을 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마치 제 일처럼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마 저보다 훨씬 금융 지식도 많고 상식도 풍부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혹은 저보다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철두철미한 사람들이었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리 되었으니,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의 ‘악마의 지혜’는 정말 일반 사람들의 예상 정도는 거뜬히 뛰어넘나 봅니다.
2억을 손해 본 사람도, 거기에 이용된 사람도, 또 5억을 손해 본 사람들도 삶을 포기했습니다. 거금을 꿀꺽한 범죄자는 뻔뻔하게도 두 다리 뻗고 살고 있을 텐데, 피해자인 본인이 도리어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가공할 현실이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이들을 가엾게 여기면서, 한편으로 저는 왜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약 3억을 손해 보았으니, 금액적인 측면만 놓고 따지면 저 또한 충분히 삶을 포기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신랑과 아들을 위해서 제가 살아가는 걸까 싶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거꾸로 그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상속 포기를 하게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부모님을 위해서 제가 살아가는 걸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인지하고 경찰서에서 진술할 때 곁에 있어준 이는 부모님이었고, 이자가 급속도로 불어나는 제2금융권 대출을 가장 먼저 막아준 이도 부모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제가 경찰서 드나드는 모습을 보인 순간과, 빚을 졌던 그 순간이 가장 제가 죽고 싶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앞서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이 그런 선택을 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일 것입니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가족한테 미안하면 죽을 생각 말고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죽고 싶어집니다. 스스로를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전에는 우울증 환자들이 가족에게 미안하다면서 세상을 등지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제가 큰일을 당하고 나니 왜 그렇게 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가족들까지 함께 괴로운데, 저는 그럼 왜 살고 있는 걸까요? 반대로 이야기해서, 저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들보다 덜하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우선 A형 간염이 저를 살렸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도 전에, 간염 때문에 몸이 너무 아파서 그저 식사를 맛있게 하고 두 다리 성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으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직장이 저를 살렸습니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는 그렇게 직장이 싫고 불편하더니, 당장 경제적으로 궁해지자 월급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정신의학과 의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뇌리에 새겨두고 살고 있습니다. ‘환자분 잘못이 아니에요.’ 라고 하셨거든요. 바로 그거였습니다. 저는 제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신랑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의사 선생님이 제 기를 너무 살려놨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 잘못이 아니라는 말의 힘을 믿습니다. 그게 제 삶의 원동력이니까요. 사람이 감당하기 버거운 피해를 겪게 되면, 반성을 할수록 삶의 의지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반성은 ‘과거’로 향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통렬한 반성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제 문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결되었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과거로 왔다갔다 하면서 미칠 듯이 후회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삶을 지속해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범죄자는 제가 아니고 사기 친 이들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한 ‘잘못’이 형사적 범죄에 대한 단어라면, 작정하고 사기 친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고, 제게 잘못이 없는 게 맞습니다. 저는 그들을 믿은 실수를 했을 뿐입니다. 으레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유책을 더 문제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그러한 종류의 생각이 전쟁과 각종 폭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궁극적으로 ‘빗장으로 문을 잠가두지 않아도 걱정 없는,’ 신뢰가 바탕에 깔린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훔친 도둑이 아니라 ‘빗장을 제대로 걸어두지 못한 네가 문제’ 라는 사고가 팽배하다는 건 그 사회가 결국 병들었다는 증거일 따름입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좀도둑 탓에 빨래도 빨랫줄에 제대로 못 널었다는데, 우리들은 옆집에 며칠씩 택배 상자가 놓여 있어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회의 윤리 의식을 더 발전시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사무치게 제 오판을 곱씹어보며 저의 수명을 깎느니, 범죄자들이 보란 듯이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소위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면, 일단 스스로가 건강한 삶에 감사를 느껴야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다행히 저는 이 세 박자가 맞아떨어져 한 걸음씩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범죄자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의 삶이나, 일이나, 저 스스로의 가치가 낮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판단하는 사람인 제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까요. 이건 가족들도 해줄 수 없고, 오직 본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판단입니다.
부도덕한 사람들로 인해 괴로움을 호소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여러분의 가치는 본인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뼈아픈 실수를 한 저조차, 스스로를 드높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동안 힘들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도 삶을 포기하지 마시고, 자존감 있게 하루하루를 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