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바스 멘탈코치 Dec 17. 2024

밑바닥 노동자가 경제적 자유를 얻기까지 (1)

    


온갖 노동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던 알바스 멘탈 코치의 처절했던 세월들의 기록을 이곳에 남긴다. 몸이 아픈 나와 내 아내의 남은 삶을 위해서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지방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의 인생은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나는 건축공학과를 졸업하였으나 건축기사 자격증도 취득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학점도 형편없어서 제대로 된 직장은 취직할 수도 없었다.


대학 4학년을 다녔으나 이수 학점을 채우지 못해 1년을 고스란히 더 다녔다. 나는 진작에 학교를 중퇴하고 싶었으나 부모님께서 졸업만큼은 꼭 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그냥 졸업을 했던 것인데 정말 철없는 청춘이었다.     



별 볼일 없던 나의 인생     

그 후 대학을 졸업한 후에 경험을 했던 수많은 직업들을 나열하면 아마 놀랄 것이다.

공공근로 참여자, 신용카드 모집원, 건설 현장 막노동, 박스 공장 직원, 모텔 청소부, 어린이집 봉고차 지입기사, 속셈미술학원 기사, 입시학원 버스기사, 해○음료 영업사원, 자동차 운전학원 강사, 레미콘 회사 품질 관리원, 대리운전기사, 배달대행 기사, 그리고 대형 탱크로리 기사까지 이런 일들은 모두가 다 내가 했던 직업이었다. 하루나 이틀 아르바이트했던 것까지 쓴다면 아마 책 한 페이지쯤은 더 쓸 수 있다.


나는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심지어 내 아내까지도 식당 일을 하면서 같이 돈을 모았으나 생활은 늘 빠듯했다. 그런 중에 내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였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더욱더 생활 형편은 악화되었다.


나의 평균 수입은 2백만 원을 조금 넘었고 아내도 식당 일을 했으나 겨우 100만 원 남짓이었다. 그런 중에 둘이서 번 수입을 이런저런 공과금과 대출이자 내고 악착같이 돈을 아껴서 통장에 모아갔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대형 탱크로리 트럭을 몰고 내가 근무하는 지방 도시 전북 익산에서 강원도 철원까지 위험물을 가득 싣고 250km가 넘는 장거리 운행을 하게 되었다.    


무려 17년이나 된 대형 탱크로리 트럭은 그야말로 고물이었다. 심지어 1월에 히터도 나오지 않는 그 차를 몰고 추운 새벽 먼 길을 가야만 했다. 어찌나 추운지 손은 얼어있었고 입에서는 입김이 나며 다리는 덜덜 떨리는 그런 상황에서 어디서 그렇게 찬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는지 차 안은 그야말로 냉동실이었다.


특히 초저녁 잠을 잘 수 없었던 나는 거의 멍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는 때가 많아서 머리는 지끈거리고 배는 고프다 못해 쓰려오기 일쑤였다     

보통 그렇게 먼 길을 갈 때는 밤 12시나 새벽 1시 정도에 출발을 하는데 그때 출발을 해야 밀리는 시간대를 비켜서 빨리 갈 수가 있었다.


납품할 공장 직원들이 출근하면 복잡하기에 최대한 빠르게 하차를 해야 했었다. 동이 틀 무렵에 도착하여 하차를 한 후 부지런히 복귀하면 오후 두세시 정도에는 익산공장에 도착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다음날 일하는 것에 지장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 양주에서 15톤 정도를 하차한 이후에 내려오는 길은 비가 오고 있었다. 은현 I.C를 지나 고암 I.C 방면으로 달리는 중에 갑자기 차의 시동이 꺼져 버렸다.


그날은 토요일 아침이었고 시동이 꺼진 트럭을 멈출 때까지 최대한 갓길로 이동을 시킨 후 직장에 이 사실을 알리니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제대로 점검을 안 하고 운행을 하였다며 책망만 하였다.


보험회사에 전화하여 대형 특수 레커차를 불렀고 그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한 시간 반 정도를 나는 트럭 뒤에 서서 노란색 안전복을 흔들며 내 차의 후미를 다른 차들이 추돌하지 않도록 신호를 하였다.


외곽 도로에서 비를 맞으며 노란색 안전복을 흔들고 있는 중년 아저씨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그날은 내 인생 터닝포인트가 되는 날이며 그날 이후로 노동자 생활을 청산을 했다.

아무튼 나는 오른쪽 어깨 근육이 파열되어 더 이상 일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고장 난 차를 견인하여 수리 한 이후에 직장에 반납하고 그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 나는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되어 경제적인 자유를 얻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다. 어깨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기까지는 6개월 정도가 걸렸고 나는 부동산이나 주식 채권 코인 등 관련된 책들과 성공에 관련된 서적들을 구입하여 그야말로 닳고 닳도록 공부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부동산이나 주식에 눈을 떠갔으며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만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남아 있는 삶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경제적 자유를 찾기 위한 나의 처절한 몸부림은 밤도 낮도 없이 이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