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과적 증상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 환청이나 피해망상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우울증은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무력한 모습이 상상된다. 공황장애라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시달리는 장면이 연상되는데, 생각만 해도 그 증상이 몸에 다시 나타나는 것 같다.
또 어떤 경우에는 증상에 대한 판단을 불신한다. 대표적인 진단이 ADHD라고 하는 주의력결핍 행동과다 장애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있는 건데 굳이 장애라는 이름을 붙여서 병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견도 많다. 그 뒷 배경에 있는 제약회사의 역할을 암시하면서.
그런가 하면 증상이 어떤 큰 불행의 작은 단서처럼 느껴져서 두렵다. 소화가 안되어서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 나오는 식으로 행동이나 대인관계에서의 조그마한 변화가 혹시 자신을 이상한 사람을 낙인찍은 단초가 될까 신경이 쓰이고 두렵다. 그러니 그걸 확인시켜주는 약물 복용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증상은 인정하는데 굳이 병원 치료를 받아서 환자가 되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른 대안을 찾는다. 대안이 가장 많은 게 정신질환이 아닐까? 라식 수술이나 중이염 수술을 학교 선생님이나 종교인에게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정신질환은 문턱이 낮아서 목사님, 선생님, 음악이나 미술 같이 예술하는 분들, 심리 전공자나, 사회복지 하는 분들, 체육 하는 분들, 한의학 하는 분들, 무속인들, 무술 연마하는 분들, 요가하는 분들 등등 너무 많은 경쟁자들이 있다. 한 마디로 전문가, 박사님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앞에서 열거한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얕본다. 한의원과 내게 같이 다니는 어떤 환자 분이 한의원에서 들은 말을 해준다.
“그거 다 말장난이야!”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이 있으면 당연히 문제 해결에도 소극적이 되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 증상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럼 하나하나 짚어 보도록 하자.
우선 증상을 바라보는 배경을 얘기해 보면, 특성(trait)과 상태(state)의 구분이다.
특성은 기질과 비슷한 의미인데 ‘마음의 체질’ 같은 거다. 쉽게 바뀌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살아온 특성이다. 제일 어릴 때는 순한 애/까다로운 애로 구분을 하고 좀 크면 조용한 애/나대는 애, 더 크면 내성적인 애/외향적인 애, 강박적인 애/덜렁대는 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특성이다. 특성은 대체로 인격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반면 상태는 잠시 있다가 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생기면 그에 반응하여 잠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잘 살다가 시험에 실패하거나 실연을 당하고 그 전과 눈에 띄게 다르게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또 없어지는 게 상태이다. 즉 외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일시적으로 힘든 상태가 되는 거다. 너무 죽을 것 같아도 거기서 벗어나면 정말 말 그대로 씻은 듯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특성과 비교해서 더 두드러지고 평소의 자기와 다르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지만, 소나기가 금방 그치듯 금방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가장 흔한 정신과적 증상 중의 하나인데 특성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고, 상태 때문에 나날 수도 있다. 만약 강박적인 사람이라면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완벽주의도 강박의 일부로 볼 수 있으니 완벽주의자를 상상하면 더 편할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다 아는 거 시험을 봐도 남들보다 더 불안해한다. 그런데 공부는 그에 맞춰 더 열심히 한다. 그래서 괜히 엄살떨다가 시험 더 잘 봐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과도하게 하는 게 문제이긴 해도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니까, 시험을 못 보는 문제는 없다. 즉, 특성적인 불안은 그 사람이 오래 데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에 적응이 되어 있다.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이러니까 특별히 더 심하게 불안할 것도 없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게 문제이긴 해도 현실적인 문제를 더 일으키지도 않고, 그 사람도 마음이 불편하긴 해도 적응이 되어 있는 편이라서 새삼스럽지는 않다.
반면에 상태로 인한 불안은 안 그러던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 평소의 정신적인 밸런스가 깨진 상태가 된다. 그래서 더 힘들다. 낯선 상황일 때가 많으니 더 크게 다가온다. 불안으로 인해서 평소의 대처전략이 작동이 되지 않아서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도 더 크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그 사람에게 ‘내가 뭔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성에 의한 불안과 달리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더 안정적이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상대적으로 더 양호한 불안일 수도 있지만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 정신과에 오는 건 뭔가 특별한 사건이다.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문턱이 낮아지긴 했어도 아직도 약간은 안 오고 싶은 곳이다. 그럼에도 오는 건 평소의 밸런스가 깨졌기 때문이다. 즉, 상태로 인한 증상이 생기거나 심해져서 병원을 찾는 거니까 단기간의 치료가 끝나면 나아질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대체로 더 잘 지내는 경우도 많은데도 부담을 느낀다. 그리고는 위에서 얘기한 상태로 인한 증상의 여파가 미친 상태이다.
- 뭔가 큰일이 난 것 같고,
- 뭐가 뭔지 모르니 당황스럽고,
- 무엇보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소나기가 거세게 와도 금방 끝나는 것처럼, 내 증상이 상태에 의한 것이라면 거기에 적응하고 대처하면 금방 나아질 것이라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좋겠다.
또 이상해 보이기는 해도 그게 내 인격은 아니라는 거, 그게 훨씬 더 중요하다. 감기 증상을 생각해보자. 감기 걸리면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감기가 그런 증상들은 없어진다. 무슨 일, 주로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힘들어져서 폭식을 하거나, 누구에게 욕을 하거나, 우울해져서 무력해지거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거나 해도 그게 정말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라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기침처럼, 정말 잠시 나를 괴롭히다가 지나갈 증상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