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너무 시끄러운 세상, 왜 옳다고만 외치는가?

『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두 번째 글

by 멘토K

요즘 세상은 참 시끄럽다.
뉴스를 틀면 누군가의 분노가 터지고, SNS를 켜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정의’가 바뀐다.
누군가는 “이게 진짜 옳다”고 외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건 틀렸다”고 반박한다.
문제는 이제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옳은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모두가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는 점점 좁아진다.
내 생각과 다르면 틀렸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
그 사이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말하지 않아도 욕먹고, 말하면 더 욕먹는다.
결국 사람들은 생각보다 ‘진영’을 선택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습관”이다.


공자(孔子)는 『중용(中庸, The Doctrine of the Mean)』에서 이렇게 말했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드러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은 마음의 균형이고, 화(和)는 관계의 조화다.”

마음이 중(中)을 잃으면 분열이 일어나고, 행동이 화(和)를 잃으면 갈등이 생긴다.


이 구절은 중용(中庸)의 핵심이다.
즉, 감정은 있어야 하지만, ‘절도(節度)’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감정을 절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크고 강할수록 ‘진정성’ 있다고 여긴다.
분노가 설득보다 빠르고, 자극이 진실보다 쉽게 퍼진다.


이 시대의 목소리는 너무 크다.
사람들은 ‘소리’로 싸운다.
그 소리가 커질수록, 세상은 조용히 들여다볼 여유를 잃는다.
침묵은 지혜의 표현이 아니라 ‘비겁함’으로 오해받고,
생각의 여백은 ‘무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진정한 중용(中庸) 은 바로 그 ‘조용한 공간’에서 피어난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가 지나치게 성급할 때 이렇게 말했다.

“過猶不及(과유불급)” —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이 말은 단순한 경구가 아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스스로의 감정과 판단을 가다듬으라는 경고다.

273.png



나는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진짜 ‘옳음’을 추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옳다는 확신’에 취해 있는 걸까.


확신은 편하다.
모호함을 견디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확신이 지나치면 오만이 되고,
오만은 대화를 닫아버린다.
‘내가 맞다’는 말은 곧 ‘너는 틀리다’는 선언이 된다.
결국 세상은 대화가 아니라 단정의 전쟁터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덕(德, Virtue)’이란 바로 이 극단 사이의 중용(中庸, The Mean) 에 있다고 했다.
용기(勇氣)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사이에서,
절제(Temperance)는 쾌락과 금욕의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는 덕을 “상황과 감정, 그리고 이성 사이의 균형”이라고 정의했다.
즉, 덕이란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깊이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도 이 원리와 다르지 않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문제는 언제나 ‘누가 맞느냐’보다 ‘누가 먼저 소리쳤느냐’로 끝난다.
그 순간, 관계의 균형은 깨지고, 대화는 사라진다.


내가 만난 한 지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잘못한 사람보다, 먼저 화내는 사람이 이겨요.”
그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내는 사람이 이긴다는 건, 이성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조직이나 사회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이 무너졌다는 신호다.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는 『중용』에서 이렇게 말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이 바로 배움이다.”


중용의 핵심은 결국 본성의 회복이다.
감정이 아니라, 본성에 귀 기울이는 것.
남을 이기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본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소셜미디어는 우리 안의 ‘소리’를 증폭시킨다.

화내는 글, 비난하는 영상, 분노의 댓글이 더 많은 ‘좋아요’를 얻는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하게 외친다.
“나는 옳다.”
“너는 틀렸다.”
그러나 그 끝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진짜 현명한 사람은 큰소리로 옳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묵묵히, 자기 삶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말은 짧지만, 행동은 길다.
그들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음’이란 소유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임을.


중용(中庸)은 그런 사람의 태도를 말한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힘.
그건 이론이 아니라, 매일의 연습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감정이 치밀어도 잠시 호흡을 고르며,
때로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바로 중용이다.


세상이 시끄러워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큰 확신이 아니라, 조용한 통찰이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
그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그건 “내가 옳다”는 외침이 아니라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공자는 말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


“군자는 조화롭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되 조화롭지 않다.”


다른 생각이 공존할 때, 세상은 조화로워진다.
그러나 같은 소리만 반복될 때, 세상은 병든다.


이제는 누가 더 옳은가보다
어떻게 함께 옳을 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너무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중심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사람 덕분에 세상은 아직 완전히 기울지 않는다.
그가 바로 오늘의 군자(君子),
그리고 진정한 중용(中庸) 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 멘토 K -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
이전 01화#1. 양극단의 시대, 왜 다시 중용(中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