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彼者 心安也』 스물 다섯번째 글
이웃과의 거리는 참 묘하다.
너무 멀면 서로 어색하고, 너무 가까우면 불편하다.
현관문 하나 사이에 있지만, 마음의 거리는 조절이 쉽지 않다.
특히 친한 척하며 경계를 넘어오는 유형을 만났을 때 마음속 피로감이 빠르게 쌓인다.
예의와 불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우리의 태도가 오히려 이들을 더 들이밀게 만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유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경계를 넘나드는지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웃 간의 예의는 얇은 종이처럼 존재한다.
여기엔 법이나 규칙이 없다.
서로의 감각이 기준이 될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감각’이 낯설다.
가벼운 인사는 좋은데, 멈출 타이밍을 놓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 스친 인사였는데, 갑자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황하게 들려주기도 하고,
현관 앞에서 장보는 걸 보면 “어? 오늘 또 고기 사셨어요?” 같은 사적인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이들의 특징은 친근함을 관계의 깊이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몇 번 웃으며 인사했다고 해서 곧바로 개인 영역까지 들어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웃이라면 돕고 사는 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은 소중하다.
하지만 정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시간을 가져도 되는 이유가 된 걸까.
문제는 이런 유형은 자신이 건너온 선을 잘 모른다는 데 있다.
“좋은 마음으로 한 건데 왜 싫어하죠?”라는 말 뒤에는
상대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만 기준이 되는 시선이 자리한다.
정은 서로 좋을 때 정이고, 한쪽만 불편하다면 그것은 정이 아니라 부담이다.
이웃 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 한 가지는 ‘과한 도움’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파 보였다며 본인이 쓰던 감기약을 가져오거나,
주말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을 눌러 “집에 뭐 필요한 거 없어요?”라고 묻는 식이다.
도움은 고마운 마음으로 남을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상대가 원하지 않는 도움이라면 그건 이미 도움이 아니라 간섭이다.
이 유형의 속내는 인정 욕구에 가깝다.
‘내가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관계를 넓히려 한다.
하지만 받는 사람은 점점 경계심을 세운다.
이런 이웃을 상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싫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같은 건물, 같은 층, 같은 동에서 지내야 하니 말 한마디가 오래 영향을 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계속 불편함을 숨기면 상대는 더 깊숙하게 들어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부드러운 경계다.
“아, 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 인사는 여기까지 할게요.”
사나운 표정도 필요 없고, 구체적인 이유도 필요 없다.
짧고 가벼운 문장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대화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만, 복도에서는 인사만, 현관 앞에서는 오래 서지 않는 등의 암묵적 경계가 있다.
이 기준을 내가 먼저 지키면 상대도 어느 정도 감을 잡는다.
작은 도움은 감사하되, 과한 행동은 가볍게 선을 긋는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짧은 한마디가 관계를 수월하게 만든다.
경계를 세우면서도 무례하지 않으려면, 말투는 부드럽되 내용은 분명한 방식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말이 상대의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해주고 분명한 의미는 내 공간을 지켜준다.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잘 지낸다는 말이 무엇인지 서로의 기준이 다르다.
한쪽은 가깝다고 느끼지만, 다른 한쪽은 오히려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 관계의 어려움은 정답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건 서로의 속도와 온도를 존중하는 태도다.
이웃 간의 관계는 갑자기 깊어지지도 않고, 당장 멀어지지도 않는다.
일상의 작은 장면들 속에서 서서히 정리된다.
이웃은 우리 삶을 둘러싼 가장 가까운 타인이자, 가끔은 가장 조심스러운 타인이다.
누굴 피곤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서로의 거리를 느끼는 감각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필요한 선을 세울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가 관계를 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편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