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정의부터? 시각화부터?
최근 서울권 창업학회 사람들을 조금씩 만나고 있다. 로컬러닝랩이나 부싯돌 프로젝트 참가자와 비슷한 위치에서 시작하지만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이들은 어떤 식으로 비즈니스에 접근하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부싯돌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는 이해관계자의 문제를 정하고 그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필요한 요소를 찾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맞춰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현재 언급 중인 프로토타입 개발/검증 과정은 이해관계자를 통한 문제정의 이후에 거치는 단계이다. 이를 통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하게 돈을 지불하며 해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서울권 창업학회들은 문제의 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되는지를 먼저 보는 경향이 강했다. 탑다운 방식으로 평소 눈여겨 보았던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른 섹터의 문제를 가설로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을 빠르게 만들어 테스트를 돌린다. 랜딩페이지나 광고 등에서 솔루션이 반응이 오면 그때부터 솔루션을 좀 더 디벨롭하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끊임없이 개발/검증한다. 만약 이 분야가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버리고 빠르게 다른 아이템을 시도한다. 그들은 이렇게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하여 실행하는 활동을 프로토타입 개발/검증 이전 단게인 '프리토타입'이라고 부른다.
문제를 너무 깊이 있게 파다보면 이해관계자랑 동화되어 오직 그들만을 위한 솔루션을 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수익성이 고려되지 않고 단지 봉사나 자선활동에 그치는 수준으로 솔루션이 나오기도 한다. 처음부터 돈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되어서 돈이 되는 것을 어거지로 끼워맞추다가 문제정의 흐려지는 경우도 많다.
반면 아이템 위주로 빠르게 검증하다보면 이해관계자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대와 연대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진정성이 많이 무시될 수 있다. 수치가 좋아 투자자들에게는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산업 생태계에 깊이 있게 속해 있는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해내기는 어려울 때가 있다.
빠르게 위에서부터 치고 빠지는 것, 밑에서부터 천천히 진득하게 올라가는 것, 그 둘 중에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같은 경우에는 실행 기반의 가설 검증 과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며 빠르게 시도하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빠르게 버리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디자인씽킹 과정에서는 이해관계자의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 내기만 하면 사실상 솔루션은 쉽게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이는 구매로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핵심 포인트라고 말한다. 둘 중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자유이지만 선택하기에 앞서 자신이 진입하고자 하는 산업의 특성과 창업의 목적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창업가가 F&B 처럼 경쟁이 심하고 차별화 하기 어려운 시장에 있는 창업가는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할까? 이 시장에서는 품질의 우위를 높이기 쉽지 않기 때문에 브랜드의 팬층을 만들어 진정성 있게 아이템을 가져가는 것이 유리하다. 내가 타겟하고자 하는 고객과 진입하고자 하는 시장의 이해관계자와 길게 호흡하며 자신의 제품 스토리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원하는 기존 대안의 한계를 명확하게 짚어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니즈를 파악하다보면 한 명 한 명이 다른 대체제가 아닌 우리 제품/서비스를 재구매하게끔 만드는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팬층으로 이어진다. 이때 문제정의 과정이 돈이 안되기 때문에 대충하는 창업가들도 많은데 레드오션인 시장에서는 이 과정이 오히려 차별화 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 특별별하고 화려한 기술을 가진 프랑스 파티쉬에보다 성심당이 잘되는 이유는 대전 시민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위한 빵을 만들며 도시 내에서 신뢰 자본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가 너무 커서 경쟁자가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회색지대에 진입하고자 하는 창업가들은 이해관계자들을 인터뷰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존 대안의 한계를 알아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인터뷰를 많이 하다보면 그 문제가 여태까지 왜 해결되지 못했는지 알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기존의 한계에 압도 당해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설로 설정하고 빠르게 프로토타입 또는 프리토타입을 만들어 접근하는 방식이 유리할 수 있다. 문제가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고착화되어 있던 분야는 여태까지와는 아예 색다른, 미친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하는데 이 때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다 보면 기존의 한계들과 비슷한 솔루션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구두로 말해서 검증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기존에 자신이 이미 알던 것에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똑같은 아이디어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데이터가 오염될 수 있다. 이럴 경우 문제정의와 가설 검증을 좀 더 빠른 호흡으로 가져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문제에 더 깊이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결국 현장에서 부딪히고 뛰면서 알아내는 사람이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것 같다. 레드오션 시장에서 프리토타입 검증 방식으로도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회색 지대에서도 문제정의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솔루션이 핵심을 관통할 수도 있다. 이것은 오직 그 분야에 대해 생각하고 실행하고, 돌아보고, 다시 실행한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해답이다.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다면, 나가서 만들거나, 테스트하거나, 인터뷰라도 해보자